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중앙신인문학상/ 평론 부문-당선작] '사건'의 문학, 성찰적 글쓰기

1. 수필, 부딪치며 쓰기 김광섭의 「수필문학소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무심히 생활주위의 대상에, 혹은 회고와 추억에 부딪쳐 스스로 붓을 잡을 때 수필은 제작되는 것이다(인용자 강조).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라는 구절로 유명한 이 글에서 김광섭은 수필문학은 “탁마된 세련과 각고의 노력”을 들여야 하는 것으로 단순한 기록에 머물러선 안 된다고 한다. 김광섭에 따르면 “붓 가는 대로” 쓴다는 것은 아무 생각 없이 쓰는 것이 아니라, 시나 소설, 희곡 등 다른 장르와 달리 논리적 의도나 의식적 동기를 배제한다는 뜻이다. 수필은 또 “붓 가는 대로” 쓰기 때문에 “개성적이며 심경(心境)적이고 경험적”이라고 한다. 이러한 수필은 ‘무형식의 형식’이 특징이다. “붓 가는 대로”, 즉 무형식의 형식으로 쓰는 수필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한 정답을 찾기란 어렵겠지만, 김광섭의 글은 한 가지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앞에 인용한 대목의 강조된 부분을 보자. 김광섭은 수필이 개성적이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 “부딪침”1)이 있어야한다고 한다. 대상과 추억에 부딪치는 것이 수필의 동력이다. 수필의 화자는 객관적 대상뿐 아니라 심경, 즉 추억과 기억의 이미지에 부딪친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사물과 자연의 풍경, 유년의 추억과 마음 저 밑바닥에 꽁꽁 묻어둔 상처들을 어느 날 문득 조우할 때 수필의 계기가 마련된다. 어떤 요구나 계획된 의도가 아닌, 부딪침에서 “스스로” 나온, “아무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평정한 마음으로 마치 먼 곳의 그리운 동무에게 심정을 말하듯이”, 즉 “붓 가는 대”로 글이 시작된다. 이 부딪침은 하나의 ‘사건’2)이다. 사건은 역사적 시공간에서 새로운 것이 출현하는 방식이다. 사건은 모든 의미화 혹은 개념화 과정에 선행된 구체적 현상이자 ‘해프닝’이다. 우리의 삶은 이런 사건들로 시작해서 끝난다. 탄생 그 자체가 이미 사건이며, 성장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한 인생의 사건들이다. 생의 종착역, 죽음도 하나의 사건이어서 우리는 한 존재의 사라짐을 애도하는 예식을 치른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사건을 의미화 혹은 재현하는 과정이다. 시나 소설, 희곡이 사건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한다면, 수필은 사건, 즉 부딪침의 해프닝에서 촉발되는 자아의 진솔한 반응을 담는다. 자아가 경험하는 온갖 부딪침을 있는 그대로 언어로 옮기는 문학이 수필이다. 그래서 김광섭은 수필은 어디에서 어느 때나 인간사회에는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 장르라고 한다. 수필다운 수필에는 부딪침의 사건이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은 ‘타자’이다. 현대철학에서 ‘타자’는 나를 포함한 모든 대상을 의미한다. 남이라는 뜻의 ‘타인’과 달리 ‘타자’는 대상, 신과 자연 등 나 아닌 모든 것뿐 아니라, 내 안의 타자, 즉 무의식까지도 포함한 개념이다. ‘타자’개념이 성립하려면 다른 한쪽에 ‘나’라는 개념이 필요하다. 이 ‘나’는 누구인가? 기존 수필에서 화자인 ‘나’가 서정적 화자로서 정서와 사고를 독립적으로 이끄는 동일성의 자아로 이해되었다면, 이 글에서 조명하려는 ‘타자’의 반대 항으로서의 ‘나’는 ‘주체’로 구성되어간다. 어떤 실체나 고정점에 정박하지 않은, 언제나 구성되는 과정 중에 있는 주체는 내부적으로 (의식과 무의식으로) 분열되어있는 불안정한 존재이다. 하지만, 이 ‘나’는 불안정하기 때문에 오히려 뜻밖의 만남이나 사건을 통해 자신을 능동적으로 바꿀 가능성이 있다. 대상이나 심경, 추억 등의 부딪침을 통해 ‘나’는 “붓 가는 대로” 글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변화하게 된다. 김광섭의「소고」를 다시 읽으면서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진실을 만들어가는 불완전하지만 열린 주체로서의 성찰적 ‘나’라는 화자를 수필에서 발견하게 되었다. 이제 수필은 주체가 ‘타자’와의 조우를 통해 사물과 세상을 향한 성찰적 시각을 얻는 ‘사건’이 일어나는 문학적 ‘장소(place)’가 된다. 부딪침의 ‘사건’과 성찰적 ‘나’로서의 화자 개념은 특히 재미한국수필을 새롭게 읽을 비평적 지평을 제공한다. 재미한국수필은 대체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감을 토로하거나 이민경험을 기록하는데 그치는 문학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적지 않은 작가들이 낯선 시공간에 놓인 이민주체의 부딪침과 성찰적 변화를 조명해 왔다. 이민생활의 부침을 겪는 주체에게는 이식된 땅, 타향뿐 아니라 두고 온 고향까지도 낯설어 진다. 낯선 경험은 물론 타향살이에서만 비롯되진 않는다. 삶은 본원적으로 낯설다. 탄생의 순간 터져 나오는 울음소리는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생경함을 표현한다. 어떤 삶이라도 본래 낯선 것이라면, 이민주체는 그 낯선 삶을 가장 낯선 방식으로 살아간다고 볼 수 있다. 이 낯섦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붓을 잡게” 만든다. 이민주체는 늘 ‘타자’와 부딪친다. 이들의 ‘타자’는 낯선 이방(異邦)의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 사물, 어떤 상황일 때도 있고 내면 자아일 때도 있다. 어떤 것이든 이방인으로서 살아갈 때 주체는 삶에 대한 본원적 소외와 이질감, 내면적 갈등과 변화의 첨예한 현장에 놓이게 된다. 이 글에서는 박봉진의「날개」와 정옥희의「싼페드로 항구가 여는 아침」, 두 편의 수필을 꼼꼼히 읽으면서 이민주체가 낯섦과 마주하는 방식 그리고 그 낯선 부딪침을 통해 어떻게 화자가 성찰적 주체로 변해 가는지 살펴볼 것이다. 낯선 만남 앞에서 “스스로 붓을 들어” 수필을 쓸 때 시나 소설을 쓰는 것보다 더 효과적으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다. 타자와의 만남 속에서 분석의 대상이 된 ‘나’는 자아와 세상을 성찰적 시각에서 바라볼 위치를 얻기 때문이다. 2. 박봉진의「날개」4) 박봉진의「날개」는 낯선 대상과의 부딪침으로부터 저절로 흘러간다. 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은 단순하지 않다. 화자는 어느 날 오후 예기치 않은 대상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선입견 탓에 연달아 일어난 착각을 반성하게 된다. 화자가 새를 날려 보내면서 자신의 착각에도 날개를 달아 날려 보내기 까지 두 가지 일화가 시청각적 이미지로 정교하게 구성되어 의미를 직조한다. 첫 번째 일화는 외출준비로 부산한 아내의 소리로 시작된다. 아내의 외출은 집안에 작은 소란을 피우고 나서 시작된다. 웬만큼의 세월을 살았건만, 분주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헤어드라이어 돌아가는 소리, 병뚜껑 딸각거리는 소리, 옷장 문 여닫는 소리(...) 종종걸음으로 화장실과 부엌순례를 끝내고도, 몇 차례 현관문이 퉁탕거린 후에야 겨우 바람 분 뒷날처럼 집안이 조용해진다(16쪽). 아내가 전면에 등장하거나 화자에게 응대하는 직접적 묘사가 없는데도 화자의 귀에 들려오는 소리만으로도 아내의 존재는 크다. 화자는 옷 시중을 해달라거나 차 시동을 걸어달라는 아내의 부탁에 짐짓 불평하고 있지만 종종대며 집 안팎을 분주히 돌아다니는 아내를 은근한 사랑을 담아 묘사한다. 무엇보다 아내가 외출준비하면서 만들어내는 소리를 무심히 지나치지 않고 섬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위에 인용한 글 서두의 아내에 대한 묘사는 우연이 아니다. 아내는 마치 새처럼 움직인다. 새 한 마리가 집안에 들어와 “딸각거리고” “종종”, “퉁탕”거리는 것처럼 들린다. 아내에 대한 이러한 청각적 묘사는 두 번째 일화로 연결된다. 아내가 외출한 뒤 얼마 안 있어 또다시 “토닥거리는 소리”가 난다. 이 소리를 들으면서 화자는 아내가 또 칠칠맞게 뭔가를 빠트린 것으로 넘겨짚는다. 부주의한 아내가 못마땅해서 아내를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그런데 그 소리는 없어지지 않는다. 급기야 화자는 참지 못하고 한마디 해주려고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그곳에 아내는 없고, 새 한 마리가 부엌창문에 붙어서 “푸닥거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거실바닥에도 한 마리가 떨어져 있었다. 화자는 두 마리의 새를 보면서 여전히 아내 탓을 한다. 정신없이 나가다 문을 열어놓았다고 넘겨짚는다. 아내는 종종 뒷문을 닫는 것을 잊곤 했다. 그때마다 벌새가 들어와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켰고, 파섬(possum)이 들어왔을 때는 아내가 혼절까지 하지 않았던가. 화자는 지난 일을 들먹이면서까지 아내를 질책한다. 하지만, 화자의 착각이었다. 나는 거실의 소파를 돌아서 현관문 쪽으로 갔다. 그런데 이제 어찌 된 영문일까? 현관문은 닫혀 있었고, 새가 들어 왔을 만한 데는 아무 데도 없었다. 나는 내 정신을 의심하려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흔들어보고, 손등으로 눈꺼풀을 문질러 보기도 했다(18쪽). 마치 환상지대(twilight zone)로 들어간 듯하다. 눈을 비벼 볼 정도로 믿기 어려운 상황을 주체가 맞닥뜨린 것이다. 어떤 대상이 현실구조 바깥에서 들어와 글의 흐름을 바꿔버렸다. 주체가 타자와 마주치는 ‘사건’은 이 장면에서처럼 비현실적인 환상처럼 느껴지면서 현실적 시공간을 낯설게 만든다. 화자는 이 환상지대를 통과하면서 성찰적 자아로 변해간다. 아내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킨 심리적 착각과 달리 여기서 화자는 물리적 ‘착각’을 경험한다. 화자의 성찰은 이 착각에서 벗어나 “어쨌든 새를 먼저 집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는 현실적 판단에 출발한다. 거실바닥에 떨어져 있는 새를 조심스레 손에 쥐어 들며 화자는 절대자와 인간의 관계를 떠올린다. 이 상황에서 ‘절대자’인 화자의 손에 잡힌 미약한 존재인 새는 화자가 안전하게 날려 줄 것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새는 마치 절대자의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는 인간과도 같다. 화자는 한때 절대자의 뜻을 모르고 방황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새에게 압박을 주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다루면서 화자는 좋은 의도를 갖고 있더라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게 되기도 하는 인간관계의 아이러니를 사색한다. 화자는 새를 동쪽으로 날려주고 나서 두 번째 새를 잡으러 들어온다. 종작없이 날라 다니는 새를 잡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화자는 허둥댄다. 거실에서 이리저리 나는 통에 몇 번이나 유리창문을 들이받았고 가구 위의 작은 액자들을 넘어뜨렸다. 새의 소란도 파업 궐기같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일까. 작은 흔들림 후에 큰 흔들림이 뒤따르는 지진처럼 여기저기서 불쑥거렸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19쪽). 새를 잡으러 여기저기 부딪히고 소란을 떠는 와중에 알 수 없는 연쇄반응 같은 움직임이 느껴진다. 화자는 멈춰서 상황파악을 한다. 알고 보니 파이어프레스 안에 들어있던 새들의 움직임이었다. 화자의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새가 집안에 들어와 있던 것이다. 이제 모두 여덟 마리의 새가 방안으로 날아 들어와 푸닥거리기 시작했다. 손으로 하나씩 잡기가 어려워져 뜰채로 한 마리씩 잡아 모두 같은 방향인 동쪽으로 날려 보낸다. 길 잃지 않고 서로 잘 만나서 함께 여행을 떠나라는 마음씀씀이다. 여기까지가 두 번째 일화의 끝이다. 새들이 어디서 어떻게 들어왔는지 미스터리는 풀린 셈이다. 적어도 현실적 설명은 가능해졌다. 하지만, 비현실적 환상의 경험은 여전히 남아있다. 처음 새의 출현을 목격하던 순간부터 여러 마리의 새들이 방안으로 들어오는 장면까지를 화자의 심리적 상태의 객관화라고 볼 수 있다. 텅 빈 집에 남게 된 화자가 이유 없이 아내를 트집 잡았던 마음이 새들의 출현으로 출렁인다. 화자의 사유는 아내에 대한 속 좁은 착각에서 비롯되어 새들이 불러일으킨 ‘착각(혹은 환상)’을 가로지르고 나면, 수필 전체를 두고 볼 때 얼핏 사족처럼 보이는 한 대목에 이르러 환경론자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점점 투기대상이 되어 사라져가는 자연과 미국 초기의 식민 역사를 아우르면서(19-20쪽) 피와 편견으로 물든 미국 땅의 역사로 종횡무진 확대된다. 새들의 갑작스런 출현이라는 부딪침이 이끄는 대로 붓을 집어 들고 한 주제에서 다른 주제로 넘나들며 무심한 듯 글을 써감으로써 김광섭의 ‘무형식의 형식’을 획득한 것이다. 새들이 떠나고 남아있는 집안은 아수라장이 되어있다. 그놈들이 파이어프레이스 안의 그을음을 풀무처럼 날갯짓으로 마구 불어냈고, 또 몸에 묻혀서 사방으로 날아다녔기 때문에 거실바닥과 창문틀엔 새까맣게 그을음이 앉았고 매일 아내가 먼지를 터는 아이보리색 가죽소파 역시 온통 그을음을 뒤집어썼다(21쪽). 이제 사태는 바뀌어 화자가 아내에게 잘못을 저지른 처지가 된다. 이를 화자는 모두 순전한 자신의 착각 때문이라고 한다. 아내가 느리고 잘 잊는다는 선입견과 새들이 들어온 것을 몰라 신속히 처리 못한 자신의 탓이다. 화자의 깨달음은 개발주의자나 백인정복자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도 상통한다. 모두 선입견과 편견, 상대방에 대한 ‘착각’에서 비롯된 해악이기 때문이다. 이제 화자는 이런 사색의 과정을 거쳐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이 고집스런 착각에 날개를 달아 날려 보낼 준비를 한다. 그 착각이란 것은 때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들어가면 좀체 움직이려 하지 않는 것이 탈이다. 그러나 마음먹기 따라서는 신속히 날려 보낼 수 있는 가변의 날개를 달 수 있지 않은가. 그 기미가 언뜻 보이기만 하면 나는 지체 없이 그것에 날개를 달아 줄 테다. 후회는 행위에 매여서 끈처럼 뒤따라 올 텐데 그것에 앞서면 모두가 편안할 테니 말이다(21쪽). 3. 정옥희의「싼페드로 항구가 여는 아침」5) 아직도 어둠이 검북청색으로 어른거리고 있는 새벽에 “물기 어린 공기”를 느끼며 화자는 산책을 시작한다. 걷기와 여행은 재미한국수필의 단골소재이다. 이미 고향을 떠나온 주체는 반복해서 어디론가 떠나려고 한다. 새로 정착한 곳은 삶의 터전일지언정 고향은 될 수 없다. 하지만, 돌아갈 고향은 없다. 세상은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민주체는 낯선 곳을 향해 정처없이 떠나고 어디에도 없는 마음의 고향을 찾으려한다. 정주하지 못하는 영혼이 생활에 묶여 떠나지 못할 땐 낯익은 거리로 나간다. 이 글에서 화자는 주치의의 조언에 따라 산책을 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마치 산책이 일이나 의무인 듯이 말하지만 하루를 시작하는 새벽에 대한 묘사는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산책이 어떤 존재의 부름에 부응하는 것처럼 묘사된다. 검북청색 어두움이 서성이는 신새벽에 문을 밀고 밖에 나왔다. 물기 어린 공기가 뺨에 와 닿는다. 잔디밭으로 내려섰다. 젖은 양탄자를 밟은 양 발바닥이 포근하게 물이 차오른다. 아침 이슬이 흠뻑 내려와 주었는가 보다. 싼페드로(San Pedro) 항구 쪽이 수줍은 복숭앗빛으로 물드는가 했더니 차차 오래가 붉은 색으로 넓게 번져나간다. 바야흐로 여명이 시작되는 참이다(29쪽). 해 뜨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수줍은” 복숭아 빛이 어떤 색인지 궁금해진다. 당장에라도 여명의 순간을 목도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글이다. 이 글에서의 여명은 싼페드로 항구라는 특정 지명의 것이다. 매일 아침 세계 곳곳에서 여명이 시작되지만, 이 글에선 화자가 딛고 선 땅의 여명이 구체적으로 느껴진다. “물기 어린 공기”나 “포근하게 차오른다”는 표현은 구체적 장소의 시간적 변화, 자연적 변화를 생생하게 그린다. 이 지방색 짙은 여명의 순간은 이 글에 고유한 정취를 부여해준다. 흔히 수필에서 등장하는 산책하는 화자의 시선과 상념이 자신의 감흥이나 감정에 빠져있을 때 풍경이나 대상은 구체성이나 고유성을 잃게 된다. 정옥희의 글에선 풍경이 화자를 부른다. 화자는 여명의 새벽에 부딪쳐서 산책을 나간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주섬거리며 옷을 챙겨 입고 운동화도 찾아 신었다. 집 둘레를 한바퀴 걸을 참이었다. 엊그제 주치의 오박사는 나에게 콜레스테롤 수치가 좀 높으니 걸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진찰 시 매듭이 굵은 손을 내밀며 주춤거리자 젊은 의사는 서슴없이 말했다. “이 손은 자랑스러운 손이지 부끄러운 손은 아니지 않습니까?” 했다. 요즘의 젊은이 중에도 저렇게 사려 깊은 말을 할 줄 아는 이도 있구나 싶어 가상하게 느껴졌다(30쪽). 노동으로 굵어진 손을 내미는데 주춤하는 화자에게 자랑스러운 손이라고 말해준 주치의를 고마워한다. 여명의 새벽이 산책의 흥을 돋우고 그 흥이 주치의를 떠올리게 되는 과정은 맺힌 데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이런 자유연상은 아이비(Ivy)줄기가 너무 변화가 없어서 싫다(30쪽)는 개인적 감정표현과 화자를 졸졸 쫓아오던 집개의 이야기로 계속 이어진다. 아이비와 개에 관련된 대목을 꼼꼼히 살펴보면 간단치 않은 복선이 깔려있다. 가령 아이비가 “게으른 사람의 풀꽃”이라 싫다고 하는 대목은 세상의 변화에 뒤쳐져 있는 화자 자신에 대한 반성과 연결된다. 이어지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변해가는 세상을 감당할 수 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화자는 변화에 사려 깊게 반응한다. 개를 쫓는 대목은 “머리끝이 쭈뼛 곤두서는” 느낌으로 시작한다. 길모퉁이를 도는데 서걱거리며 누군가가 내 뒤를 밟는 것 같이 느껴졌다. 머리끝이 쭈뼛 곤두선다. 뒤를 돌아다보았다. 내 집의 점박이 작은 개였다. (...) 그렇게 개를 쫓느라고 나는 집까지 되돌아와야만 했다(30쪽). 여명이 깔린, 아직 어둑한 시간 인적 드문 길에서 산책은 불안하다. 뒤따라오는 것이 개라고 확인했을 때 두려움은 안도감으로 바뀌지만, 한적한 교외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에 대한 경계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는다. 이후 화자는 산책길에서 두어 번 사람들과 마주치고 남의 집 개도 보게 된다. 이런 대목들은 짐짓 안정된 중산층 교외 주택가의 흔한 정경이지만 그 이면에는 선과 악, 행과 불행, 안정과 불안, 권태와 긴장 등의 이원적 가치들에 대한 화자의 예민한 시각이 스며있다. 화자는 산책 중에 두 번 ‘부딪친다.’ 한번은 두 명의 젊은 남자가 뒤에서 걸어와 화자가 자리를 내어준다. 앞서 가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뭔가 심상치 않다. 그들이 꺾어 돌아간 산책로를 들여다보니 두 남자가 손을 잡고 있었다. 이 장면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윌로우 스프링 트레일(Willow Spring Trail) 말길로 꺾어 내려가고 있었다. 나도 늘 이 길로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가파르고 골이 깊어 무서워서 용기가 나지 않던 곳이었다. 그들을 따라 들어갈까 하다가 두 젊은이가 손을 꼭 잡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걸으며 내 인생은 늘 제자리걸음으로 살아온 것을 새삼 느꼈다. 세상은 많이 변해 있는 것을. 누구나가 스트릭(Strict)하다고 공인하는 이 산 속 오지에도 새로운 변화의 물결은 이미 들어와 있지 아니한가(32쪽). 집에서 나와 보니 많이 변한 세상이 하나씩 나타난다. 화자에 의하면 “스트릭(strict)” 한 “산속 오지”가 자신의 생활터전인데 그곳까지 밀고 들어온 변화의 물결-- 이 경우엔 동성애자 커플 -- 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체념적 수용이라고 하기에는 넉넉하고 유연한 시각이 엿보인다. 두 남자가 사라진 산책로는 화자가 늘 가보고 싶었으나 무서워서 용기가 없어 가지 못했던 곳이다. 그곳은 가파르고 골이 깊어 무섭지만 들어가 보면 어떤 변화를 경험할 만한 곳이다. 마치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연상케 하는 이 대목에서 프로스트의 시적 화자와 달리 이 수필의 화자는 그 길로 가지 않았다. 아마도 두 남자에게 그 장소를 조용히 내어주려는 의도였는지 모른다. 그 길은 손을 잡은 두 남자들을 위한 것이지 화자의 것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 것이기도 하다. 두 손을 잡은 남자들이 걸어 들어간 그곳은 화자에겐 금지되지 않은 금지구역으로 남아있다. 두 번째 부딪침은 오르막길에서 내려오다가 만난 한 여인이다. 처음 보기에 그녀는 “히스패닉 같기도 하고 동양계 같기도” 하다. 여인은 자신을 남미에서 오래 살았던 중국계 소설가로 소개했다. 화자는 보통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낯선 이와 마주할 때 남녀의 성과 인종에 근거한 구별 짓기가 몸에 밴 사람이다. 이 글에서 화자는 두 차례에 걸쳐 변해가는 세상의 타자들에 대한 무의식적 선입견을 드러낸다. 선입견은 불가피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화자가 주저 하지 않고 자신의 “제자리걸음”을 인정하는 태도이다. 게다가 이 두 번째 일화에서는 중국계 여성과 화자 사이에 발견된 공통 이해관계 -- 작가라는 사실과 일본을 싫어한다는 점--를 찾아서 구별 짓기에 따르는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나름 노력한다. 한편 화자는 변해가는 세상과 부딪칠 때 자신의 고집을 굽히지 않기도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쌍꺼풀 수술을 권했던 안과의사가 떠오른다. 나이가 들어 눈이 시려오고 눈물이 자꾸 나오지만 화자는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 해도 쌍꺼풀수술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여전히 타협 불가능한 고정관념, 혹은 화자가 지키고 싶은 신념이 있기 마련이다. 쌍꺼풀수술은 절대 못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난 화자는 곧이어 땀을 닦으려고 무심코 옷섶 자락을 들어 올린다. 배꼽이 보일까 걱정되지만 이 나이에 어떠랴 하면서 자신이 점점 능글맞아진다고 한다(33쪽). 김광섭은 수필이 단지 기록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유머”와 “위트”가 필요하다고 했다.6) 화자가 자신을 ‘능글맞은 여인’이라 부르는 대목은 유머를 적절히 가미해 자신의 고정관념을 고집하면서도 조금씩 마음의 빗장을 열어가는 화자의 유연한 태도를 밋밋하지 않게 전달해준다. 정옥희는 노년의 처지가 손을 내보이기 어려울 만큼 부끄럽고 책을 읽기 힘들만큼 불편하며 콜레스테롤 걱정으로 억지 산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만, 능청스럽게 삶을 관조하고 살면서 전전긍긍했던 터부와 금기도 가끔은 슬쩍 넘길 수 있는 성숙한 주체의 위치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글의 화자는 늙어가는 자신과 통제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렵게 빠르게 변하는 세상 사이의 괴리와 불협화음을 긴장과 여유로 조정해간다. 자신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을 받아들이기 -- 이는 타협이 아니다. 포기나 굴복도 아니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손마디가 굵어지고 눈꺼풀이 내려앉는 육체적 노쇠에도 화자는 자신이 그어 놓은 선을 훌쩍 넘지 않으면서도 서서히 시선을 밖으로 향한다. 이런 화자의 태도는 마지막에 카터대통령처럼 환하게 웃는 장면에 담겨있다. 앞뜰에 닿았을 때는 내 입에서 단 김이 뿜어져 나왔다. 두 손녀가 손나발을 불고 있었다. “하알머니이...” 아이들을 보고 즐거워진 나는 카터대통령의 웃음스타일로 앞니 열두 개가 다 보이도록 웃는다.(33쪽) 이미 해는 중천에 떠 있고 안개는 걷혔다. 새벽 안개가 그녀가 살아온 인생의 터널 같은 것이라면 산책을 마친 아침 10시는 그녀가 세상과 부딪치고 돌아온 환한 시간이다. 4. ‘사건’으로서의 수필 쓰기 수필의 맛은 어떠한 시간에 어떠한 문제나 어떠한 대상에 작가의 기분이 부딪쳐서 표현되는 인간미에 있다. - 김광섭, 「수필문학소고」(인용자강조) 이 두 수필은 재미한국수필에 기대되는 천편일률적인 소재인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나 상실감, 향수 어린 추억 혹은 이민생활의 고된 노동과 박탈감 등을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직접 다루지 않았다고 해서 이런 내용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가령 정옥희의 마디가 굵은 손가락을 보자. 정옥희는 자신의 심산했던 이민생활에 대해 신세 한탄을 하지 않는다. 다만, 굵은 손가락 마디가 부끄러워 의사에게조차 보여주기 싫어하는 마음의 표현을 통해 그녀의 고되었던 생활을 독자가 느끼게 해준다. 마찬가지로 박봉진의 글에는 아이들이 타 도시로 떠나 부부만 남은 집이라는 공간이 있다. 새를 잡느라 분주한 한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상상하는 독자는 어느새 그 빈 공간의 적막함을 느끼게 된다. 정옥희와 박봉진의 수필집에 수록된 다른 글들에는 물론 고향의 이야기, 흔한 이민생활 이야기가 담겨있다. 수필집을 다 읽은 독자라면 두 수필가가 다루는 소재의 폭과 깊이를 이미 알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의 수필을 접해보지 못한 독자라도 이 두 편의 수필에서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은 것들을 행간에서 읽을 수 있다. 그런 수필이 우리의 마음에 깊게 울림을 준다. 행간을 통해 우러나오는 의미는 수필가의 필력에 달려있다. 두 수필가는 주제를 내세우는 대신 대상과의 부딪침이라는 사건을 충실하게 묘사함으로써 전달한다. 사연은 달라도 각자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고 미국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살아온 이민 1세대 정옥희와 박봉진의 글은 이미 갈등과 상처를 겪어 지나온, 세월의 풍파를 거쳐 온 사람들의 표면적으로 정적인 삶에도 여전히 부딪침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꿈을 이룬 인간의 삶에도 부딪침은 일어난다. 사건은 중단되지 않는다. 두 수필작가는 안정된 삶의 표면장막을 찢고 파이어프레스를 통해 집안으로 날아드는 새들과 평안한 교외의 아침 산책길에 의도하지 않게 목격하는 색다른 정체성들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는 섬세한 감수성과 성찰적 사유로 이민주체의 문학적 성취를 한 단계 높여주었다. 이로써 이 두 수필은 ‘사건’이 되었다. 1) ‘부딪치다’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다른 사람이나 사물에, 또는 둘 이상의 사람이나 사물이) 힘있게 닿아지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부딪다’의 능동적 형태이다. ‘부딪히다’는 이와 달리 수동적 형태이다. 주어의 행위에 따라 능동인지 수동인지 구별해서 사용된다. 김광섭의 글에서 능동적 의미의 ‘부딪치다’가 사용된 것은 따라서 수필작법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2) ‘사건’의 개념은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가 발전시켰다. Alain Badiou, Being and Event (Continum: 2005). 3) 주체’와 ‘타자’의 이론적 개념에 대한 대략적 이해는 현대철학, 특히 정신분석이론에 따른 것이다. 4) 박봉진 수필집, 『언제나 내 마음 바다에 살아』 (2004: 선우미디어)에 수록됨. 이 글에서 따온 인용문의 철자법, 표기법, 문장구조 등은 모두 원본 그대로임을 밝혀둔다. 5) 정옥희 수필집, 『로우링힐스의 여인들』 (2000: 동화서적)에 수록됨. 이 글에서 따온 인용문의 철자법, 표기법, 문장구조 등은 모두 원본 그대로임을 밝혀둔다. 6) 직접 인용하면, “수필은 잡다한 모든 것이 그냥 그대로 내용이 될 수 있다 하더라도 단순한 기록에 그쳐서는 우리의 흥미를 긴장시키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유머가 있어야 하겠고 위트가 있어야한다. 전자는 무의식적 소성(素性)에서 피는 꽃 같은 미소요, 후자는 지혜와 총명의 샘과 같다. 이 천성(天性)스런 유머와 보석 같은 위트는 수필의 본성과도 같은 것이다. 만일 이러한 속상을 갖추지 못한다면 수필은 그저 무미건조한 생활적, 심경적 기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김광섭, 「수필문학소고」) 라고 했다. 수필작가들이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수상소감 수필을 쓰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독자가 찾지 않는 글은 메아리를 동반하지 않은 공허한 외침일 뿐입니다. 쓰는 사람이 많아지는 만큼 읽는 사람도 많아졌으면 합니다. 그래서 수필평론이라는 낯선 곳에 첫 발을 내딛게 되었습니다. 재미 원로수필가 두 분의 수필을 읽으며 보낸 시간은 제 마음속에 잔잔한 물결을 이루어 아직도 흐르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에게도 그 물결이 닿기를 바랍니다. 제 평론을 읽은 독자가 이 두 작가의 글을 찾아 읽게 되면 좋겠습니다. 재미한국수필을 오랫동안 일구어 온 많은 작가들과 당선의 기쁨을 함께하고 싶습니다. 척박한 이민생활에서 ‘스스로 붓을 들고’ 글을 써오신 분들이 있어 제 글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14-05-20

[중앙신인문학상/ 수필 부문-가작] 겨울 햇볕이 주는 행복

아침운동 길에 나섰으나 공기가 차가워 나도 모르게 빨리 걷게 됩니다. 샤봇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생겨난 길에서도 양지바른 쪽을 선택해서 부지런히 걷습니다. 호숫가의 아침 공기는 찬물을 한 대접 마신 것처럼 가슴에 와 닫습니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호수를 반 바퀴쯤 걸어가면 낚시꾼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마루판을 물 위에 띄어 놓은 곳이 나의 반환지점입니다. 캘리포니아의 긴 겨울 가뭄으로 흙길에 먼지가 발에 차이고 호수도 물이 말라 한 길은 내려가야 수면입니다. 물 위로 아침 햇살이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고 호수 깊은 곳에서는 물닭 여러 마리가 분주히 먹이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떠다닙니다. 약병아리보다 조금 더 큰 물닭은 몸체가 둥글고 까만색에 주둥이 위쪽 이마에 선명한 흰색이 있어서 눈에 잘 띕니다. 몽실몽실한 게 앙증맞고 귀여우면서도 똘똘하지만 야생조류여서 겁이 많아 사람이 근처에 다가오는 걸 싫어합니다. 철새인 물닭이 이곳에서는 사시사철 머물고 있어 텃새나 마찬가지입니다. 낚시터 마루판도 물이 빠진 만큼 내려가 있더군요. 아무도 없는 마루판 위를 디뎌 봅니다. 인기척을 듣고 놀란 물닭이 푸드득 대지만 도망은 가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는 겁니다. 살펴보니 이게 왼 변인가요. 버려진 낚싯줄에 엉켜 제 힘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처지더군요. 얼마나 오랫동안 발버둥치며 괴로웠겠어요. 썩지도 않는 낚싯줄에 꽁꽁 묶여 지난밤을 꼬박 새웠을 물닭이 치근하고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영락없이 죽게 생겼습니다. 엉켜있는 낚싯줄을 풀어 주려고 엎드려 줄을 잡아 당겨봅니다. 물닭은 내가 해치려는 게 안인가 해서 날개 짓을 해 대며 도망가려 합니다. 날개 짓에 차가운 물방울이 얼굴에 튀깁니다. 낚싯줄을 들어 올려보니 이럴 수가 있나요, 낚싯줄은 두 다리에 칭칭 감겨있고 줄은 다시 목을 감아 날개까지 묶여있는 겁니다. 사람도 이 정도로 묶여 있다면 꼼짝없이 죽고 말 것 같았습니다. 물닭은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 꽥꽥 소리를 지르며 야단이 났습니다. 주둥이로 내 새끼손가락을 물질 안나, 발버둥 치질 않나, 날개를 푸드득 대며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다리와 목을 엉켜 매고 있는 줄부터 끊었습니다. 낚싯줄은 가늘고 질겨서 원만해서는 끊어지지도 않습니다. 왼손으로 물닭의 두 다리를 잡고 오른손으로만 엉킨 줄을 풀어 주려고 했더니 너무나 요동치고 발광을 해 대서 도저히 풀어 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바닥에 내려놓고 발버둥을 치든지 말든지 나는 나대로 줄을 끊어야 했습니다. 먼저, 낚싯줄을 끊어 두 다리를 자유롭게 해 놓고 이번에는 목에 감긴 줄을 끊어 목도 자유로워졌습니다. 날개에 엉켜져 있는 줄마저 풀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목에도 발에도 못다 풀어준 줄이 남아 있는데 물닭은 가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성화에 못 이겨 놓아 주었더니 쏜살같이 내 달려 갈대숲으로 사라집니다. 무릎을 일으켜 젓은 손을 바지에 쓱쓱 닦았습니다. 아마도 전생에 물닭이 나를 살려 주었던 인연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 선한 일을 행하면 복이 금세 오지는 않더라도 화가 저절로 멀어진다. 하루 악한 일을 행하면 화가 금세 오지는 않더라도 복은 저절로 멀어진다." 일산 전철역 벽에 걸려 있는 풍경소리에서 읽은 글귀가 떠오릅니다. 물닭이 낚시 줄에 얽매여 꼼짝달싹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현대문명 속에서 살아가려면 알게 모르게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무선 통신망이, 전파가 나를 얽어매고 있는 게 안인가 여겨집니다. 보이지 않는 인터넷 전파, 손에 늘 들려있는 스마트 폰 전파, 집에 들어서면 틀어야 하는 LED 전파, 차를 타면 들어야 하는 라디오 전파 이 모든 파장이 나의 눈과 귀와 손, 발을 묶어 놓고 있는 건 아닌지, 이런 전파가 눈에 보이는 거미줄 같지는 않지만 낚시 줄처럼 길게 다가와 내 몸을 뱅뱅 돌면서 결국 묶여지는 건안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런 느낌은 직감으로 뇌리를 스쳐 가기도 하고 건강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를 순간적 이나마 깜짝 놀라게도 합니다. 물닭이 낚시 줄에 엉켜 있듯이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파에 온 몸이 둘둘 감기고 얽어 매여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이도 샤봇 호수에는 얼마간의 전파나마 차단되어 있어서 스마트 폰도 안 터집니다. 물닭의 낚싯줄을 내가 풀어 주었듯이 나를 동여매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선들은 호수가 풀어주고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호수가 고맙다는 느낌이 듭니다. 반환지점을 돌아 다시 오던 길로 갑니다. 올 때도 그랬듯이 갈 때도 밝은 햇살이 호수 물결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게 합니다. 물결 따라 반짝이는 은빛 비늘은 다이아몬드를 한 주먹 뿌려 놓은 것처럼 빛나 보입니다.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한 햇살이 호수에 널리 퍼져 있고 나는 햇볕을 흠뻑 받으며 걷고 있습니다. 흔하디 흔한 햇볕이 오늘처럼 몸과 마음을 따듯하고 훈훈하게 녹여준 날은 없었습니다. 전파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요. 햇볕을 받으며 걷는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요.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행복과 사랑과 평화를 만끽하는 겨울날 아침입니다. ▶수상소감 수필 가작으로 선정된 걸 고맙게 생각합니다. 변변치 못한 글을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 드리며 신인 문학상을 제정해 운영해 주시는 미주 중앙일보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그동안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지난날들과 써야만 하는 참기 어려운 욕망이 가져다준 선물이라고 여겨집니다. 미력이나마 동포사회에 희망과 꿈을 안겨주는 글을 써 보겠습니다. 상금은 샌프란시스코 프시리오에 세워질 '한국전 참전 기념비' 건립기금 모금에 기부하겠습니다.

2014-05-20

[중앙신인문학상/ 수필 부문-가작] 겨울 햇볕이 주는 행복

아침운동 길에 나섰으나 공기가 차가워 나도 모르게 빨리 걷게 됩니다. 샤봇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생겨난 길에서도 양지바른 쪽을 선택해서 부지런히 걷습니다. 호숫가의 아침 공기는 찬물을 한 대접 마신 것처럼 가슴에 와 닫습니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는 호수를 반 바퀴쯤 걸어가면 낚시꾼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마루판을 물 위에 띄어 놓은 곳이 나의 반환지점입니다. 캘리포니아의 긴 겨울 가뭄으로 흙길에 먼지가 발에 차이고 호수도 물이 말라 한 길은 내려가야 수면입니다. 물 위로 아침 햇살이 은빛 비늘처럼 반짝이고 호수 깊은 곳에서는 물닭 여러 마리가 분주히 먹이를 찾아 두리번거리며 떠다닙니다. 약병아리보다 조금 더 큰 물닭은 몸체가 둥글고 까만색에 주둥이 위쪽 이마에 선명한 흰색이 있어서 눈에 잘 띕니다. 몽실몽실한 게 앙증맞고 귀여우면서도 똘똘하지만 야생조류여서 겁이 많아 사람이 근처에 다가오는 걸 싫어합니다. 철새인 물닭이 이곳에서는 사시사철 머물고 있어 텃새나 마찬가지입니다. 낚시터 마루판도 물이 빠진 만큼 내려가 있더군요. 아무도 없는 마루판 위를 디뎌 봅니다. 인기척을 듣고 놀란 물닭이 푸드득 대지만 도망은 가지 못하고 허우적대고 있는 겁니다. 살펴보니 이게 왼 변인가요. 버려진 낚싯줄에 엉켜 제 힘으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처지더군요. 얼마나 오랫동안 발버둥치며 괴로웠겠어요. 썩지도 않는 낚싯줄에 꽁꽁 묶여 지난밤을 꼬박 새웠을 물닭이 치근하고 애처로워 보였습니다.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영락없이 죽게 생겼습니다. 엉켜있는 낚싯줄을 풀어 주려고 엎드려 줄을 잡아 당겨봅니다. 물닭은 내가 해치려는 게 안인가 해서 날개 짓을 해 대며 도망가려 합니다. 날개 짓에 차가운 물방울이 얼굴에 튀깁니다. 낚싯줄을 들어 올려보니 이럴 수가 있나요, 낚싯줄은 두 다리에 칭칭 감겨있고 줄은 다시 목을 감아 날개까지 묶여있는 겁니다. 사람도 이 정도로 묶여 있다면 꼼짝없이 죽고 말 것 같았습니다. 물닭은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지 꽥꽥 소리를 지르며 야단이 났습니다. 주둥이로 내 새끼손가락을 물질 안나, 발버둥 치질 않나, 날개를 푸드득 대며 아우성을 치고 있습니다. 다리와 목을 엉켜 매고 있는 줄부터 끊었습니다. 낚싯줄은 가늘고 질겨서 원만해서는 끊어지지도 않습니다. 왼손으로 물닭의 두 다리를 잡고 오른손으로만 엉킨 줄을 풀어 주려고 했더니 너무나 요동치고 발광을 해 대서 도저히 풀어 줄 수가 없습니다. 다시 바닥에 내려놓고 발버둥을 치든지 말든지 나는 나대로 줄을 끊어야 했습니다. 먼저, 낚싯줄을 끊어 두 다리를 자유롭게 해 놓고 이번에는 목에 감긴 줄을 끊어 목도 자유로워졌습니다. 날개에 엉켜져 있는 줄마저 풀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목에도 발에도 못다 풀어준 줄이 남아 있는데 물닭은 가겠다고 아우성입니다. 성화에 못 이겨 놓아 주었더니 쏜살같이 내 달려 갈대숲으로 사라집니다. 무릎을 일으켜 젓은 손을 바지에 쓱쓱 닦았습니다. 아마도 전생에 물닭이 나를 살려 주었던 인연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 선한 일을 행하면 복이 금세 오지는 않더라도 화가 저절로 멀어진다. 하루 악한 일을 행하면 화가 금세 오지는 않더라도 복은 저절로 멀어진다." 일산 전철역 벽에 걸려 있는 풍경소리에서 읽은 글귀가 떠오릅니다. 물닭이 낚시 줄에 얽매여 꼼짝달싹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현대문명 속에서 살아가려면 알게 모르게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무선 통신망이, 전파가 나를 얽어매고 있는 게 안인가 여겨집니다. 보이지 않는 인터넷 전파, 손에 늘 들려있는 스마트 폰 전파, 집에 들어서면 틀어야 하는 LED 전파, 차를 타면 들어야 하는 라디오 전파 이 모든 파장이 나의 눈과 귀와 손, 발을 묶어 놓고 있는 건 아닌지, 이런 전파가 눈에 보이는 거미줄 같지는 않지만 낚시 줄처럼 길게 다가와 내 몸을 뱅뱅 돌면서 결국 묶여지는 건안인지 의문이 생깁니다. 이런 느낌은 직감으로 뇌리를 스쳐 가기도 하고 건강을 위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를 순간적 이나마 깜짝 놀라게도 합니다. 물닭이 낚시 줄에 엉켜 있듯이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파에 온 몸이 둘둘 감기고 얽어 매여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행이도 샤봇 호수에는 얼마간의 전파나마 차단되어 있어서 스마트 폰도 안 터집니다. 물닭의 낚싯줄을 내가 풀어 주었듯이 나를 동여매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선들은 호수가 풀어주고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 오늘따라 새삼스럽게 호수가 고맙다는 느낌이 듭니다. 반환지점을 돌아 다시 오던 길로 갑니다. 올 때도 그랬듯이 갈 때도 밝은 햇살이 호수 물결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게 합니다. 물결 따라 반짝이는 은빛 비늘은 다이아몬드를 한 주먹 뿌려 놓은 것처럼 빛나 보입니다.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한 햇살이 호수에 널리 퍼져 있고 나는 햇볕을 흠뻑 받으며 걷고 있습니다. 흔하디 흔한 햇볕이 오늘처럼 몸과 마음을 따듯하고 훈훈하게 녹여준 날은 없었습니다. 전파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요. 햇볕을 받으며 걷는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요. 무엇보다 바꿀 수 없는 행복과 사랑과 평화를 만끽하는 겨울날 아침입니다. ▶수상소감 수필 가작으로 선정된 걸 고맙게 생각합니다. 변변치 못한 글을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 드리며 신인 문학상을 제정해 운영해 주시는 미주 중앙일보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그동안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지난날들과 써야만 하는 참기 어려운 욕망이 가져다준 선물이라고 여겨집니다. 미력이나마 동포사회에 희망과 꿈을 안겨주는 글을 써 보겠습니다. 상금은 샌프란시스코 프시리오에 세워질 '한국전 참전 기념비' 건립기금 모금에 기부하겠습니다.

2014-05-20

[중앙신인문학상/ 수필 부문-가작] 잘매

늦은 봄날, 감꽃이 떨어질 때면 너댓살 밖에 되지 않았던 나는 희뿌옇게 동이 틀 무렵이면 일어났다. 바구니를 옆에 끼고 가서 마을 중앙에 있던 잘매 집의 뜰에 밤새 하얗게 떨어져 있는 감꽃을 주워 담았다. 감꽃을 다 줍고 나면 잘매는 나를 이불 속으로 끌어들여 나의 찬 손을 녹여주며 기특하다느니 부지런하다느니 조막만 한 손도 예쁘다느니… 온갖 칭찬을 입이 마르도록 하시며 내 엉덩이를 두드려 주었다. 그 재미로 더욱 나는 이른 아침, 깨워주는 사람이 없어도 혼자 일어나서 잘매 집으로 향했다. 잘매는 작은 엄마의 줄인 말과 경상도 방언이 합쳐진 말이다. 잘매는 산너머 가동에서 시집온 셋째 숙모님이다. 사촌들 모두 가동잘매라고 불렀다. 나는 큰어머니와 둘째 작은어머니에게는 존댓말을 했지만 가동잘매에겐 그러지 않았다. 잘매의 남편인 셋째 삼촌은 아버지 바로 위의 형님이었는데 일본으로 징용 가서 돌아갔다고 했다. 그때는 잘매 나이 스무 살이었고 잘매의 무남독녀 순자 언니는 채 돌도 되지 않았을 때였다고 했다. 아흔셋이 된 잘매는 평생을 수절하며 살아온 것이다. 양반집안 딸이라 다른 선택은 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우리 잘매의 아프고 외로웠던 삶은 시대와 관습이 만든 잔인한 희생의 시간이다. 잘매는 삯바느질을 해서 순자 언니를 중학교까지 보냈다. 그 당시에 시골에서 딸아이를 중학교까지 보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마을 아낙들에게 둘러싸여 재봉틀을 돌리던 우리 잘매를 생각만 해도 내 눈엔 눈물이 고인다. 잘매 집 안팎은 늘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화단에는 항상 고운 꽃이 가득했다. 겨울이 오기 전에 빛깔 고운 단풍잎을 한지 사이에 넣어 창호지 문을 은근하고 멋스럽게 장식하던 분이다. 성품이 온화해서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따랐다. 겸손하고 항상 양보의 미덕을 보이는 분이다. 한문과 한시를 놀라울 정도로 많이 알고 있다. 예의범절이 몸에 배어있는 분이다. 집안에 사위를 맞이하면 가문에 빠질 수 없는 엄격한 음주문화를 가르치며 품위 있게 권주가를 부르는 멋쟁이였다. 내가 시집갈 때 “시어른 잘 모시고 시댁일 친정에서 얘기하지 말고 친정일 시댁에서 말하지 말고 말을 아껴라”라고 했다. 잘매의 말로는 나는 언제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그래서 항상 그 말씀을 명심하고 지켜서 말 잘 듣는 착한 아이이려고 노력했다. 잘매는 나에게는 엄마와 다름없는 존재다. 엄마는 나에게 야단도 치고 꾸지람도 했지만 잘매는 무조건 내 편이고 나의 온갖 응석과 억지를 다 받아 주었다. 나는 잘매 앞에서는 공주보다 더 귀하고 대통령보다 대단하고 천재보다 똑똑하고 미스코리아보다 잘 생겼고 천사보다 착했다. 잘매는 이 세상에 있는 좋은 말들과 칭찬들이 나를 위해 있는 것처럼 언제나 입이 마르도록 나에게 찬사를 보냈다. 그러니 엄마보다 잘매를 찾았을 때가 더 많았다. 늘 잘매한테 업혀 다니다가 큰아버지께로부터 걱정을 듣기도 다반사였다. 잘매의 집앞에는 나지막한 토담이 있었는데 내가 그 토담에 이르러면 잘매가 와서 나를 업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마당을 걸어 들어간 적이 별로 없었다. 어쩌다가 바느질 일로 바빠서 잘매가 나를 업으러 오지 않으면 나는 심술이 나서 토담의 흙을 떼어먹으면서 버티고 서 있었다. 그러면 아무리 바빠도 버선발로 뛰어와서 나를 안고 가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여섯 살이 되어 도시로 이사를 하게 되었을 때, 잘매도 같이 가자고 울며 매달렸다. 잘매도 곧 따라갈 것이라는 말에 속아서 이사를 하였는데 끝내 잘매는 오지 않았다. 그 후로는 일 년에 두 번 씩 방학이면 어김없이 잘매 집에 가서 대부분의 방학을 보냈다. 잘매집 근처에 오면 큰소리로 ‘자-알-매-애’ 하고 뛰어오면 잘매는 ‘아이고 내 새끼 왔네!’ 하면서 뛰어와서 나를 꼭 안아주었다. 영화 속의 연인들이 상봉하는 장면이었을 것이다. 그렇다. 잘매와 나는 연애를 하고 있었다. 잘매집에는 내 이불, 요, 밥그릇, 숟가락, 요강 등이 다 갖추어 져 있었다. 잘매가 내 운동화를 빨아 널었을 때는 잘매의 새 고무신을 거꾸로 신고 다녔다. 감을 유난히도 좋아하던 내가 단감이 익기 전에 방학이 끝나는 것을 아쉬워하자 잘매는 떫은 감을 소금물에 담가 주었다. 그러면 며칠이 지나면 떫은맛은 가시고 아삭아삭 맛있는 ‘담은 감’이 되어 있다. 겨울이면 빈 장독 안에다 감홍시를 저장했다가 내가 가면 시루떡을 쪄서 따끈할 때 그 당시에는 귀했던 설탕 가루와 홍시에 찍어서 내 입에다 넣어주곤 했다. 내가 제법 컸을 때도 내 입에 떠먹여 주고 먹는 모양도 예쁘다며 넋을 놓고 바라보곤 했다. 덕분에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학교에 도시락을 싸갔을 때, 나는 그때까지도 젓가락질을 할 줄 몰라서 포크를 젓가락 대신에 갖고 갔다. 어릴 때부터 덩치가 컸던 나를 언제나 팔베개를 해서 재웠다. 내가 성인이 됐을 때까지도 팔베개해 줬던 분이다. 잘매는 언제나 깔끔하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분이었다. 쪽진 머리에 쇠 비녀를 단정하게 꽂고 다니시던 잘매. 가녀린 몸매에 다소곳하던 모습. 신문화가 들어와 마을 대부분 여자가 짧은 파마머리를 해서 시원하고 편해했지만 홀로된 과부가 그럴 수는 없다고 쪽진 머리를 고수했다. 색깔이 선명한 옷 또한 멀리했다. 세상살이에서 언제나 지는 편을 택했고 조용하게 속으로 삭이면서 사는 것이 습관이 되었던 것 같았다. 동네아주머니들의 의상을 좌지우지했듯이 미적 감각과 정서가 풍부한 분인데 고운 색깔과 멋을 몰랐을 리 없다. 스스로 평생 죄인으로 산 것이다. 잘매의 단 하나 분신인 순자 언니가 시집가서 딸 셋을 낳고 막내가 돌이 되기 전에 남편을 잃었다. 이제 언니도 고희의 나이지만 삭풍이 불어 재끼던 인생길에서 심하게 시달리더니 깊은 우울증의 늪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 잘매의 무너지는 가슴, 끝나지 않는 죄 없는 죄인의 세월 속에 얼마나 숨죽이며 몸부림쳤을까. 속으로만 속으로만 파고들던 피눈물에 멍든 가슴을 부여안고 아파하더니 말년에는 담배와 커피를 시작했다. 하루에도 담배 한 갑 이상은 피고 커피도 여러 잔 드는 듯했다. “이것들이 몸에 해롭다 카더마는 우째 이리 아직도 안 죽는지 모르겄다” 커피와 담배를 기호품으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 얌전한 우리 잘매는 빨리 죽기 위한 수단으로 시작한 것이다. 몇 년 전 순자 언니를 겨우 설득해서 우울증 치료차 산속의 뉴스타트 프로그램에 데리고 가기 전 날, 나는 잘매와 하룻밤을 같이 잤다. “내 뼈를 깎아서 네게 먹여도 아깝지 않다.” 라고 내게 말하는 잘매 앞에서 나는 목이 메어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가슴이 무너지고 있었다. 잘매는 주는 것에만 익숙했고 나는 받는 것에만 익숙했던 지난날들. 역할이 바뀌면 서로가 서글퍼지고 어색해지는가보다. 나야말로 내 뼈를 깎아서라도 잘매에게 줘도 아까울 것이 없을 텐데 말이다. 잘매께 전화를 종종 했는데 이제는 그것조차도 어려워졌다. 청력이 나빠져서 전화선 양쪽 끝에서 고함을 치다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할 말을 다 못하고 끝나고 만다. 잘매는 이제 쪽지던 머리는 짧게 자르고 등도 많이 굽었다. 몰라보게 왜소해진 모습으로 양발 도르래가 달린 워커에 의지해서 걷는다. 옛날의 단아했던 모습은 간 곳이 없다. 하지만, 눈빛은 그 옛날 총명을 잃지 않았다. 정신이 맑아서 옛일들을 그림처럼 기억해 낸다. 이제는 물기를 잃어가는 낙엽 같은 입술로 옛날처럼 내 어린 날의 칭찬을 흥분한 목소리로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한국방문 때마다 잘매를 찾아가면 “이것이 널 마지막으로 보는 것인 갑다” 하며 내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거린다. 언제나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나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린다. 잘매는 삶의 막바지 길을 내리 걷고 있는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아무 대책이 없다. 내가 잘매한테 해 줄 수 있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만큼도 되지 않는다. 나와는 달리 우리 잘매는 혼신을 다해 주기만 했던 분이다. 흥분과 기쁨으로 주었던 분. 조금이라도 더 주고 싶어서 맘졸이고 안타까워했던 분. 줄 수 있어서 고마워 했던 분. 주는 대상에게 더 감사하는 분이다. 어릴 때 읽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 주인공 노라의 마지막 말이 생각난다. 누구나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했던 그녀의 인생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자신의 삶이 그렇게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었다고, 살아볼 만한 일생이었다고 말하고 삶을 마감했다. 모든 사람이 우리 잘매의 인생이 몹시도 불행했다고 혀들을 찬다. 하지만, 불행했던 우리 잘매의 베풀기만 했던 인생에서도 주면서 만끽했을 희열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 언제나 소나기처럼 사랑을 퍼부으시던 잘매의 표정과 몸짓에서 나는 확실하게 보았다. 턱없이 기울기만 했던 잘매와 나의 사랑이었지만 그래도 우리의 사랑으로 인해 잘매도 행복한 순간은 있었을 것이다. 잘매에게 받은 사랑을 잘매께 갚을 길을 아무리 생각해도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잘매는 나의 존재를 더 고마워한다. 그리고 내가 행복하게 잘 살아주는 것으로 족하다고 잘매는 말한다. 끝까지 뒤에서 내 행복을 바라보기 원하는 분이다. 나는 거칠고 황량한 인생길 모퉁이에서 넘어져 일어나기 힘들 때 어디선가 사랑의 눈으로 날 지켜보고 있을 잘매를 생각하며 웃으며 일어설 수 있다. 그것은 잘매에 대한 참으로 이기적인 내 사랑의 숙제이기도 하지만 잘매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 나의 삶의 힘이기에 그렇다. 소박하게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던 우리 잘매의 삶은 누구에게나 모뎀이 될 것이다. 이제 나도 누군가에게 잘매가 내게 퍼부었던 사랑을 되돌려 줘야 할 것이다. 잘매를 따라 나도 조용히 혼신을 다해 베푸는 사랑의 절정에 도달하여 그 희열을 맛보고 싶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그것이 엄숙한 우주의 이치인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시시때때로 그 귀한 사랑과 추억이 내 속의 깊은 곳을 훑어 내리며 불을 지필 때마다 나는 철을 뒤늦게 알아가는 늦둥이처럼 속울음을 삼킨다. ▶수상소감 오래도 머물렀던 겨울이 아직도 모퉁이를 돌아서지 않으려 버팅기고 있을 때, 당선소식은 향긋한 봄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유난히 길었던 겨울의 늪 속에서 흐느적거리고 있던 나에게 희망으로 다가온 것이다. 이제 앞뜰의 적 목련도 살포시 문을 열기 시작했다. 수선화와 튤립을 선두로 하여 줄줄이 해동된 땅을 뚫고 강한 힘으로 올라오는 꽃들은 지난봄의 모습으로 부활하고 있다. 죽음과도 같이 세상이 미동도 않고 꽁꽁 얼어붙어 있던 겨울에서 소생의 봄을 주신 창조주께 감사합니다. 글을 다시 쓰고 싶은 용기를 주신 중앙일보에 감사 드립니다. 언제나 긍정적인 권고를 아끼지 않는 스승님과 사랑하는 가족들께 감사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소생의 희망을 주고 세포 하나하나가 기쁨으로 전율할 수 있는 글을 쓰기를 원합니다.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드립니다.

2014-05-20

[중앙신인문학상/수필 부문-당선작] 빈터

비석을 물로 씻어내린다. 동판 위에 새겨진 이름을 쓰다듬을 때 그이의 숨결이 손끝에 전해옴을 느낀다. 내 모든 감각기관을 동원하여 아주 섬세한 전율까지도 흡인한다. 남편과 내가 함께 쉴 자리로 마련된 곳은 집에서 불과 2마일 떨어진 성공회 묘지이다. 나누고 싶은 세상의 얘깃거리가 떠오르면 이곳을 찾는다. 아직 더 하고픈 말이 있는데 마주 보고 들어줄 그는 없다. 좋아하던 흰 데이지 들꽃 한 묶음으로 안부를 묻는다. 밑가지 잎을 훑어내고 꽃병에 꽂는다. 편히 누운 그들의 가슴 위치에 꽃병이 놓이는 것이라 한다. 내가 그에게 주는 꽃이지만 그가 품은 외로움 다발을 내가 건네받는 듯하여 가엾은 그리움이 스친다. 주변 묘지에 시들지 않은 꽃들이 많은 것은 그만큼 기억하는 이들이 있음이다. 머리맡에 이고 있는 비석의 오른편은 나의 빈자리로 남아있다. 어느 날 더 이상 그리움 때문에 별 사이를 방황하지 않아도 될 날에 채워질 공간이다.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 숱한 만남의 시간 속에서 어떤 뒷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모여진 하루하루를 빈 종이에 얹어본다. 수 없이 다른 모양의 나날들, 채색된 삶의 조각들이 어우러져 창공을 수놓을 때 멀리멀리 수묵향기로 퍼지고 싶다. 남편은 아픔과 함께 삶을 지탱하면서 그가 떠난 후 남을 상황에 대비한 자신의 역할을 최대한으로 갖추어 놓았다. 눈에 보이는 것들의 소유권 이양은 물론 아빠의 역할까지 감당해야 할 내게도 아이들의 튼튼한 울타리가 되라는 다짐을 잊지 않았다. 생애의 마지막 가을 찬란한 햇살 스미든 어느 날 그는 스스로 영원히 쉴 터를 정하고 싶어했다. 내 가슴은 차마 이별이 다가올까 시려오는 듯 무거운데 묘지 직원의 안내에 따라 빈 자리들을 둘러보는 그의 침묵은 차라리 살얼음판이었다. 가파르지 않게 언덕진 곳. 남향으로 굽어보이는 산자락이 드넓은 천국의 평원처럼 해맑다. 머무는 햇살이 종일토록 따사롭다. 뒤편엔 토팽가캐년의 바위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 행여 외로움을 기대며 쉴 수 있을 듯하다. 낯선 영혼들 틈에서 우리가 겪어 온 이민자의 서러움을 다시 이겨내느라 애쓰는 건 아닐까. 촘촘히 자리한 비석들이 모두의 이름들로 가득하다. '사랑받았던 아빠, 엄마, 남편, 아내, 또는 할아버지, 할머니' , 어느 젊은이의 자리엔 '귀여운 내 아기'라는 구절도 있다. 각기 끝없는 메아리로 남겨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마분지 만한 동판 위에 너울거린다. '사랑해요', '언제까지나 우리 가슴 속에 있어요', '당신을 잊지 못해요'... 그는 나와 함께 묻히는 자리를 원했다. 세상에서 못다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계속 나누기 원함일까. 어딘가 모를 영원의 세계에서 달아와 잠시 이 지상에 머물다 회귀하는 삶이 아닌가. 함께 있던 시간이 행복했다. 서로 다른 모양의 마음을 짜 맞추느라 부딪히며 아파한 날도 많았다. 고달픔을 상대에게 떠넘기고 도망쳐 사라지고픈 때도 있었다. 사랑하고 아끼며 기대어 함께 지탱해온 긴 시간이 나를 휘감아 남은 내 삶을 끌어갈 쟁기가 될 것이다. 그이와의 33년 시간에 너무 익숙해 있음인가 문득 내 혼자됨에 놀라곤 한다. 각종 서류의 ' 미망인' 칸에 표시해야 할 때, 연말 남편 동문파티에 갈 수 없을 때, 동창모임에서 남편자랑에 맞장구칠 수 없을 때면 가슴 한켠이 시려온다. 죽음도 삶의 한 부분이란 것을 마음에 새기며 일상에 몸을 맡긴다. 외로움 한 자락씩 만이라도 거둘 수 있다면 가벼운 날갯짓으로 높은 창공을 날아보리라. 가을이 깊어가는지 국화가 만발이다. 해마다 11월이면 많은 기억이 나를 깨운다. 결혼을 했고 첫 딸도 11월에 낳았다. 사랑하는 엄마도 가을국화 향기와 함께 하늘로 떠나셨다. 모두가 풍요의 계절이라고 감사의 절기라며 마음 넉넉한 시절이 돌아오면 늘 내 가슴은 떠나버린 제비들이 남긴 처마끝 빈 둥지가 된다. 철새들은 새봄이면 다시 오리라 마는 세상 길을 헤매어도 그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사랑하는 이들이다. 좀 더 머물러 주지 그랬어. 나 혼자선 너무 힘드는데. 둘이 맞잡고 가야할 길을 홀로 걸어가는 일은 외롭다. 사람은 물론 모든 사물들은 마땅히 있어야할 자리가 정해져 있고 지켜야할 시간이 있음이다. 애당초 함께 계획한 삶의 설계도가 끝날에까지 어긋나서는 안 될 일이다. 한참 진행 중인 건축물이 지진을 만난 것처럼 무너져버린 내 마음을 추스르기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이제 그가 남겨준 좋은 것들만을 안고 살아간다. 따뜻한 가슴을, 다정했던 그 손길에 묻어나는 체온을 더듬는다. 정확한 음정과 박자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마음이라며 불러주던 나훈아의 '사랑'노래가 들리는 듯하다. 두 아이에게서 아빠 닮은 모습을 찾아본다. 손자에게도 외할아버지 사랑의 파편이 녹아있음을 느낀다. 죽음을 준비하며 의식이 돌아올 때마다 내게 되풀이하여 들려준 남편의 마지막 말. '미안해, 고마워, 사랑해.'라고 내 귀에 맴돌아 울리고 있다. 남은 시간 아름다운 모습으로 살다가 나 그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땐 꼭 잡고 다시는 놓지 않으리라. 높은 하늘 구름 끝닿은 곳에 갈까마귀 한 마리가 솟구쳐 오른다. ▶수상소감 누구나 가슴 한켠에 빈 자리를 갖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채울 수 없는 자신 만의 비밀스런 곳인지도 모릅니다. 이 세상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귀하게 보존될 '참 나'를 만들고 싶습니다. 삶의 동행이었던 남편이 떠난 후 때론 모두 버리고 싶었던 마음을 추스르며 남은 시간 동안 열정을 다해 살아가렵니다. 따뜻한 글로써 빈 터를 메우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 오월의 햇살이 여유있는 아침입니다. 마음껏 사랑하고픈 오늘입니다.

2014-05-20

[시/시조 심사평] 시를 보는 눈, 향수나 그리움에서 삶에 대한 관조로 옮겨 가

타인의 시를 선한다는 것은 다소 곤혹스러운 일에 속하지만 그 과정에서 한 편이라도 좋은 시를 만났을 때 그것은 곧장 즐거움으로 치환 되는 것이 아닌가. 올해도 저마다의 경험적 자아가 빚어낸 많은 응모작들의 공통점이라면 시적 수준이 예년보다 다소 높아졌고, 시적시야도 과거지향적인 향수나 그리움에서 자신의 삶에 대해서 관조 사유하는 쪽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이번의 작품들에서 시 언어의 적절한 선택이 시의 성공 여부를 결정짓는다는 점, 말하자면 언어가 놓일 자리에 놓일 떄 한 편의 시는 빛을 발하는 행성의 존재가 되고 시인의 어둠조차도 그대로 빛이 된다는 얘기다. 김선호의 "야생화"는 그 점에서 돋보이는 작품이다. '야생들은 다 한 통속으로 불심지 하나를 품고있지' 다소 노골적인 언술로 허두를 꺼내놓고 '엘로페이지에 등재된 이름보다 더 많은 무지렁이가 들판 가득히 봄을 일으켜 세우고 있노라고' 야생화를 무지렁이로 본능의 등고선을 불지르는 불의 이미지로 그리고 진군해 오는 수렵꾼들의 모습으로 변화있게 그리고 있다. 매우 감각적인 언어와 대상의 의인화,약간은 빠른 이미지의 전개로 읽는 이에게 시적쾌감을 주고 있어 당선작으로 선정했다.가작의 정새희의 시 '겨울 밤'은 제목 그대로 겨울 밤을 보내는 한 가족의 삶의 모습이 정감있게 그려진 작품이다.화자가 그린 지짐질에 쓰는 번철이며 신라면 주문넣고 고장난 벽시계 믿고 모로 누운 남편의 느긋한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들의 자화상 아니던가. 역시 가작의 강남옥의 '고추꽃 피었네'는 '사람들이든 화분속의 푸새것이든 결손이 거름이 되는지'등 화자의 일상을 시속의 대상에 투영해서 비유진술하는 기법이 돋보였다. 손톱만한 고추꽃을 보고 '요놈들 보래 이 올된 놈들 발랑까진 것들'등의 직설적이고 자극적인 수사도 이 시를 살리는데 한 몫을 하고있다. 입상작에 넣지못한 아쉬운 작품들이 있었다.이매자의 '군화를 벗듯이' 조양비의 '나팔꽃의 기록' 명광일의 '카페 쿠바' 노명현의 시조 '수석' 김태수의 '분재된 삶'등이다. 입상하신 시인들에게 큰 박수 보내고 문운을 빈다. <심사위원: 김호길 시인 배정웅 시인>

2014-05-20

[심사평-수필] 수필 질적·양적으로 작품 풍부…평론 평론 불모지에 새 에이스 등장

수필응모작은 수필의 르네상스를 말해주듯 투고 작품수와 우수한 작품도 단연 많았다. 수상작은 나광수, 염미숙, 이수정, 장덕영, 정성희, 정숙인, 정유경등과 입선권에 든 김화진, 신재동, 주영희 등 10명의 작품으로 압축 되었고, 최종 5편에 나광수,정유경등이 포함되었지만 아쉽게 탈락되었다. 김화진의 ‘빈터’는 떠난 사람의 자리, 그 빈터를 아름답게 가꾸어나가는, 즉 어둠을 밝음으로 승화시키는 독창성과 인생을 바라보는 온유함이 돋보여서 당선작의 영예를 안았고, 주영희의 ‘잘매’는 한사람의 바이오그래피를 풀어나가는 솜씨와 인생을 관조하는 능력이 감동을 주었다. 신재동의 ‘겨울 햇빛이 주는 행복’은 샤봇호수가의 아침산책을 주제로 그 산책길의 명상을 반짝이는 은물결처럼 신선함을 주어 선에 포함되었다. 수필은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하여 생에 대한 깊은 천착과 세계를 새롭게 보는 경지가 보여야 하고, 오랜 독서와 사색을 통하여 작품을 다루는 솜씨가 탁월하여 읽고 난 후에 오래도록 감동이 남아야 좋은 작품이라 볼 수 있다. 즉 수필론의 기본에 충실한 작품과 계속 좋은 작품을 쓸 수있는 그 바탕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을 참고 했음을 밝힌다. 강수영의 평론 ‘사건의 문학, 성찰적 글쓰기’를 당선작으로 뽑는다. 미주문단은 평론 활동이 부재하다싶은 불모지인 셈인데 강수영의 수필론은 박봉진, 고 정옥희의 작품집을 함께 다룬 미주 평론단의 새 에이스로 나타난 셈이다. 한국의 평론가를 초대하지 않아도 미주이민문단의 왕성한 작품활동과 그 비평을 활성화에 큰 역활을 해줄 것으로 기대하는 뜻에서 당선작으로 뽑는다. 아쉽게도 평론은 워낙 응모작이 적고 당선작 외에 좋은 작품이 없어 가작 수상작은 없다. <심사위원: 김호길, 배정웅>

2014-05-20

[중앙신인문학상/시·시조 부문-가작] 고추꽃 피었네

흙에서 먹거리 소출 못 내면 죄스러워지는 종자가 한국 사람 밥풀 뜨는 기먹물로 남새밭 일구던 여인의 딸 미국 동부 외곽 허름한 아파트 베란다 화분에 흙 거름 채워 남새밭 일구는 오월 공중에 뜬 빨갛고 노랗고 파란 화분 화초려니 올려다보는 사람들은 모를 테다 거기, 볕 잘드는 공중 남새밭에 조선 고추 들깨 상추 부추 쪽파가 이 악물고 뿌리 내리고 있다는 것 화분이 모자라 고추 들깨 함께 심긴 놈들이 널럴히 화분 하나씩 차지한 놈들보다 더 모질게 굵어간다 사람이든 푸새것이든 결손이 거름 되는지 미국 생활 20년 냉랭한 본토박이들 틈 이 악물고 뿌리 설 내린 날 보는 듯 아프다 화분 좀 더 사고, 흙거름 좀 더 사서 옮겨 심는데 살아남겠다고 뻗은 뿌리 엉긴 게 장난 아니다 이 죄 없는 것들 갑자기 오장육부 편해져 시름대지나 않을지 걱정 보탠다 먹거리 푸새 꽃도 손 타면 정드는지 손톱만한 고추 꽃 하얗게 핀 것 보며 요놈들 보래, 이 올된 놈들, 발랑 까진 것들 오월 가기 전에 고추 따 먹겠네 사람 보다 나은 놈들 들여다 보는 눈이 매워진다 ▶수상소감 재외동포로 살면서 자주 하고 듣는 소리가 ‘정체성’에 대한 것이다. 다민족 공동체에서는 민족 정체성이, 사회적 역할 분류에 있어서는 사회적 정체성이, 성별 구분에 있어서는 성적 정체성이 개인을 규정한다. 그리고도 다른 여러 정황들이 있을 것이다. 내게 있어 글을 쓰는 것은 내 존재의 총체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작업이라 말하고 싶다.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나를 찾아가는 것은 즐겁다거나 고통스럽다거나 이전에 그냥 내 몫이다. 글로써 소통하지 못하고(않고) 살아온 도미 이후의 내 세월 또한 나는 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더 이상은 숙제를 하지 않고 잠드는 뻔뻔함 같은 느낌을 견딜 수 없었다. 이 세상에 나만큼 바쁜 사람도 드물 것이라는 오해 속에서, 생이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저물고 있다는 서글픈 인식 속에서 다시 쓰기 시작했다. 위로를 주신 미주중앙일보에 감사 드리고 심사하신 분들의 혜안을 비켜가지 않은 내 작품을 쓰다듬는다.

2014-05-20

[중앙신인문학상/시·시조 부문-가작]겨울밤

편백나무 사이로 눈 뿌린다 장정 두 사람 훌쩍 들어올린 소한 지나고 어금니 떨리는 大寒 대한 어찌어찌 넘겼으나 굵고 튼튼한 고드름 여간해서 달려있는 출출한 뱃속 주무르다 잠든 늙은 겨울 백로의 다리처럼 길어졌다 입이 궁금한 이참에 고구마 난롯불에 올려놓고 이민짐에 묻어 온 번철에 기름치고 감자부침이나 지져볼까 드라마에 푹 빠진 남편은 볼륨을 올린채 신라면 두개 끓여 달라는 주문을 넣고 고장난 벽시계 믿고 모로 누웠다 월월 건너집 개 짖는 소리에 돌아눕는 정월 스물아흐레밤 그런데 저리 울어쌌는 부엉이는 오늘밤 어디서 숙박계를 쓰겠나 ▶수상소감 폭설에 갇혀 살아온 겨울 내내 이불을 뒤집어쓰고 생각 한 건 처마밑에 매달린 고드름이 녹아내리기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춥고 지루했다. 그런 참담했던 긴 침묵의 시간 속에 두 눈을 끔벅이며 음습한 터널을 빠져나오려고 바둥대던 날 전화로 당선 소식을 받았다. 순간, 절필 선언을 그만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다, 이방에서 예외 없이 치러야 했던 참담했던 순간들. 시가 곁에 있어 포기하지 않고 맨발로 자갈밭을 걸어 갈 수 있지 않았던가. 시 때문에 닳은 발뒤꿈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고, 고백하건대 이제 그 앞에 도망치기 힘들어졌다는 사실이다. 둘의 관계, 언제까지 봄날일 지 훗날 변심할지 예측할 수 없지만, 오늘, 시를 쓰지 않고는 살 수 없겠다는 의연한 다짐 하나 가슴에 묻는다. 이 순간 겨울과 봄의 경계가 자리를 바꾸어 앉는다. 하지만, 찾아온 이 기쁨이 행복하고 때론 불행할지라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변함없는 격려로 등 다독거려 준 남편과 응원해 준 별이 솔이에게 고마움 전한다. 그리고 내 시에 늘 손을 높이 올려준 부동산 캐나다뉴스 이용우 사장님께 술 한잔 살 기회 있어 행복할 따름이다. 끝으로 부족한 시 건져 올려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과 미주 중앙일보사에 깊은 감사를 드린다. 제게 주신 과분한 창작의 격려 잊지 않겠습니다.

2014-05-20

[중앙신인문학상 / 시·시조 부문-당선작]야생화

야생들은 다 한통속으로 불 심지 하나를 품고 있지 본적도 없어 저들끼리, 끼리끼리지만 족보 없는 후레자식이라고 폭설에 밟히기 일 수지만 때가 되면 천지를 다 돌아오는, 저것들 좀 봐 옐로페이지에 등재된 이름보다 더 많은 무지렁이가 들판 가득히 등 구부리고 봄을 일으켜 세우고 있는 것을 때가 되면 잠시라도 한번 들로와 봐 굽었던 등을 쭉 펴고 일어서는 활짝 웃는 일꾼들을 만나게 될 테니까 누구랄 것도 없이 야생을 꺼내 본능의 등고선을 불 지르는, 단단한 철을 녹이는 용광로를 보게 될 테니까 구릉에 녹아 흘러내리는 철 따라 진군해 오는 수렵꾼들의 숨 고르는 소리를 들어봐 머지않아 들녘은 모두 저들 차지가 될 테니까 저들끼리 다 해 처먹을 테니까 봄철 다 삭도록 말이야. ▶수상소감 화살 하나가 시위를 떠났다 돌아갈 수 없는 포수의 품, 이제 과녁 쪽으로만 살 길을 내며 날아가는 당신 그래서 뒷모습을 볼 수 없는 당신 끝내 관중에 꽂히어 살아질, 아 하햫게 그리워집니다. 신인 문학상의 영광을 안겨 주시느라 수고를 아끼지 않으셨을 중앙일보 기자님들, 기꺼이 저의 손을 들어 최우수 당선작이라 낙점을 찍어 주신 배정웅 시인님, 김호길 시인님, 홍승주 시인님, 그리고 어려운 경제환경 속에서도 특별히 문학을 후원하여 주신 윌셔은행, CJ 아메리카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선배 시인님이 내미시는 축하의 손을 잡으며, 달리기 릴레이 트랙에서 바통을 이어받는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신인문학상에 응모하였으나 당선의 꿈을 잠시 접게 되신 분들에게도 계속 정진하실 것을 권유 드립니다. 문학은 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는 것, 희망은 스스로 가꾸고 기리는 자가 지쳐 돌아눕던 밤에 맞은 편 까만 언덕 위로 빛나던 별의 눈빛 같은 것.

2014-05-20

[중앙신인문학상/논픽션 부문-가작] 증언

에버그린 양로원의 정원에도 봄은 무르익고 있었다. 잔디가 연두색으로 살아나고 있었고, 물기가 오른 나뭇가지마다 꽃망울이 망울망울 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담장 밑으로 보이는 화단에는 각종 봄꽃들이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화단 앞쪽으로는 정원사들이 새로운 모종을 옮겨 심었나 보다. 각각의 모종이 이름표를 달고 있었다. 새로운 모종 사이로 개미들이 줄지어 간다.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언니를 위해 들고 온 빵 봉지를 열어서 빵가루를 뿌렸다. 놀랍게도 개미들은 빵가루를 중심으로 즉시 모여들었다. 큰 덩어리는 두 마리가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간다. 그들의 근로정신은 누가 훈련시킨 것일까? 세상은 천지를 지으신 분의 섭리 안에서 생동하고 있었다. 꽃향기를 따라 눈을 드니, 분홍색 매화가 한창이다. 매화나무 밑 긴 의자에 앉아서 잠시 그 향기에 취해본다. 매화는 한평생을 춥게 살아가더라도 결코 그 향기를 팔아 안락함을 구하지 않는다는 아름다운 말이 있다. 그 꽃말은 고결, 결백, 충성, 인내라고 한다. 매화꽃 닮은 우리 언니를 만나려고 나는 거의 매일 이 양로원을 방문한다. 언니는 치매에 걸려 있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는다. 세수도 방금 한 것을 잊고 수십 번을 씻고 또 씻는다. 덕분에 매화꽃처럼 깔끔하고 청결하여 향기롭다. 동부에 있는 시골 병원 의사인 외동아들을 따라서 한인이 없는 곳에서 지낸 것이 치매의 원인이 된 듯하다. 나는 삼 남매가 다 출가하여서 홀가분하였고, 아직은 건강하므로 내가 언니를 돌보기로 하고, 한인타운의 이 양로원으로 언니를 모셔온 지 2년이 지나고 있다. 언니는 비록 나를 알아보지 못하나, 나는 언니를 잊을 수 없다. 치매에 걸리기 전에 진작 모셔오지 못한 것이 한이 될 뿐이다. 현관 앞 분수대에서는 시원하게 물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분수대를 돌아서 양로원 현관으로 들어섰다. 나를 아는 간호사들이 인사를 한다. “Good morning(안녕하세요)?” “ Hi, Good morning(네, 안녕하세요)?" 나는 양로원에 오는 날이면 하루 종일 그곳에 머문다. 일손이 바쁜 한국인 간호사를 돕기도 하고, 외로운 노인들의 말벗이 되기도 한다. 응접실 T.V에서는 며칠 전에 일어난 ‘천안함 침몰 사건’을 보도하고 있었다. 서해 백령도 근처 해상에서 우리 해군의 초계함이 선체가 절단된 채 피격·침몰당하여, 젊은 우리 해군 장병 40여 명이 사망했으며 6명이 실종된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정부는 북한의 어뢰 공격으로 보고 진상을 규명 중에 있다고 한다. 북한은 아직도 ‘적화통일’의 야욕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가? 나는 이층 언니의 병실로 오르면서, 반세기도 더 전에 내가 경험한 두려운 기억 속으로 침몰한다. 1950년 6월 27일 밤에는 내내 억수같이 비가 쏟아졌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하늘도 ‘민족상잔의 슬픔’을 같이 했던 것 같다. 이튿날에는 철없게도 아침 햇살은 맑게 빛나고 있었다. 북한 공산당들은 부잣집 지주는 무조건 총살시킨다는 풍문이 돌아서 우리 식구들은 긴장하고 있었다. 어른들이 지혜를 모은 결과, 한강 다리가 끊겨서 남하하지 못하고 귀가하는 피난민들 틈에 섞여서 우리 다섯 식구는 서울 시내 낙산 밑에 사시는 할아버지댁으로 옮기기로 했다. 우리 집을 행낭 아범 식구에게 맡기면서도 우리가 어디로 가는 지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내 고향은 서울특별시에 들어 있었지만 외각지대였다. 약 300세대가 정답게 이웃하고 있는 평화로운 마을ㅡ. 나는 그 마을에서 유일한 한남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 학교는 주변에 미루나무들이 심겨져서 경계를 나타내 주었는데, 여름에는 미루나무에 앉아서 우는 매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학교 근처는 거의 논밭이었고 그 사이로 한강 줄기가 흐르면서 철둑 밑을 지나 한강 나루에 이르고 있었다. 마을 버스는 세 시간마다 운행되었는데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서울 시내로 들어가기 위해 이 버스를 이용했다. 우리 아버님은 서울 시내 종로 5가에서 할아버지와 함께 건재 약국을 운영하고 계셨다. 우리 식구가 서울 시내로 들어서니, 빨간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데, 빨간색 완장을 두른 국방색 옷을 입은 젊은이들이 지프를 타고 우리를 무서운 눈으로 바라보며 달리고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빨갱이가 남침했다’는 어른들의 말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정말로 ‘뿔이 솟은 빨간 귀신같은 사람’인 줄로 생각했던 것이다. 1950년 9월 28일, 우리 국군과 U. N군이 다시 서울을 수복할 때까지 우리 식구는 꼬박 3개월을 공산 치하에서 보냈다. 서울 수복이 한 달만 더 늦어졌더라도 우리 식구는 아마도 굶어 죽었을 것이다. 나보다 열 살 위인 언니도, 일곱 살 위인 오빠도 더 이상은 숨어 있을 수가 없었다. 언니와 오빠는 기차로 통학을 했다. 마을 중앙에 자리한 우리 집에서는 기찻길이 건너다보였는데, 아침저녁으로 두 차례에 걸쳐 기차가 우리 마을 간이역에 섰다. 아침에 통근 기차가 오면 각 골목에서 여름에는 흰색으로, 겨울에는 검은색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달려나오면서 천천히 떠나는 기차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올라타기도 했다. ‘기차 통학’하면 수용오빠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수용오빠는 우리 집 행랑아범의 아들이다. 그는 기차 도착 시각에 늦은 법이 없었다. 그가 일류 고등학교 교복을 단정히 입고 학생 모자를 눌러 쓰고 기차 통학을 할 때면, 다른 기차 칸에 실려 오던 여학생들이 모두 창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수용오빠를 넘겨다보곤 했다. 수용오빠는 키가 훤칠했고, 얼굴도 희고 귀티가 있었으며 검은 눈썹에 쌍꺼풀진 눈은 영롱했다. 게다가 목소리까지 좋아서 그가 말을 걸어오면 마치 달콤한 꿈속으로 끌려가는 듯했다. 그런 그가 우리 언니를 좋아했다. 언니의 외모는 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가냘프고 깨끗하고 고상했다. 마치 수선화를 연상시켰다. 언니는 거의 매일 기차 도착 시각에 늦는 편이다. 저녁에 잘 때 물수건으로 줄을 세운 바지를 요 밑에 깔고 잔 것이 아침에 두 줄로 바지 주름이 잡혀 있으면 그대로 입지 않고 그때야 다리미를 꺼내서 다시 바지 주름을 잡느라고 시간이 걸리거나, 식모 아줌마가 싸준 도시락 반찬이 마음에 안 든다고 바꿔 담느라고 항상 시간이 지체되는 것이었다. 기차 기적 소리를 듣고 뛰어나가는 언니를 기다렸다가 수용오빠는 언니가 기차에 오르는 것을 보고서야 같은 칸으로 올라타곤 했다. 그래서 수용오빠가 우리 언니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어른들 사이에서는 머슴의 아들이 주인집 아가씨를 좋아한다고 수군대고들 했다. 어느 날 아버님이 나에게 물으셨다. “영애와 수용이가 사귀니? 그렇다는 소문이 있던데…?” 나는 수용오빠가 언니에게 전해달라는 편지를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아닌 데요! 왜, 그러면 안 되나요?” 하며 능청을 떨었다. “안 되지! 언니에게 조심하라고 전해라!” 언니는 성격도 나와는 전혀 반대였다. 내가 수용오빠의 편지를 전하면 ‘더 이상 받아오지 마’하며 내숭을 떨었다. 매번 잘도 받아가면서 말이다. 언니는 아버님이 아시게 되면 혼이 날 것이므로 무척 조심하는 눈치였다. 아마도 나 모르게 만나기도 했을 것이다. 언니가 한동안 학교에서 특별 수업이 있었다고 하면서 늦게 귀가하는 날이 잦아졌으니까. 그런데 비상시국으로 돌변하자 수용오빠가 징집영장을 받고 말았다. 우리 고향에서는 청년 9명이 군인으로 뽑혔다. 6월 27일 아침이었다. 그때 철둑길로 달리는 기차에는 많은 군인들이 힘차게 군가를 부르며 북으로, 북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아마 수용오빠도 그들처럼 기차를 타고 북으로 달렸을 것이다. 철모르는 우리들은 마당에서 고무줄놀이를 하다가 힘껏 두 손을 흔들어 배웅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 식구는 이튿날 새벽 친구와는 이별식도 갖지 못하고 할아버지댁으로 향했다. 그것이 정든 고향과의 마지막 이별이라는 것도 모르는 채……. 언니는 식사를 막 끝내고 있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평안한 얼굴이 다. 나를 보더니 빙긋 웃는다. 매일 자기를 찾아오는 친구쯤으로 아는 모양이다. 같은 병실을 쓰고 계신 세 분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가지고 간 빵을 나누어 드렸다. 노인이 되면 어린이가 된다는 말이 맞는 모양이다. 두 분 할머니는 누가 빼앗아 갈 사람도 없는데 움켜쥔 빵을 주위를 살피며 얼른 서랍에 넣어 감추신다. 옆의 할머니는 90이 훨씬 넘으셨는데 방금 식사를 끝내신 듯한데도 곧 빵을 오물오물 맛있게 드신다. 창가로 가서 내가 사다 놓은 난초화분에 물을 준 후 라디오 채널을 음악이 나오는 곳으로 맞췄다. 옆의 할머니들은 흘러간 노래를 좋아하셨다. 그러나 언니는 귀를 막으며 곧 싫증을 낸다. 옆의 할머니들이 딴생각에 빠져드는 틈을 타서 나는 슬그머니 채널을 고전 음악으로 바꾼다. 언니는 고전 음악은 하루 종일 들어도 물리지 않았다. “내 고모가 고등학교 음악 선생이었어. 내가 그 고모 덕분에 이런 음악을 많이 들었지…….” 언니가 느닷없이 과거가 떠오르는 모양이다. ‘그렇다! 우리의 고모님은 음악 선생님이었다. 경찰인 남편과 뜨겁게 사랑하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지…….’ 공산 치하에서 석 달을 지내면서 우리는 많은 사건을 겪었다. 할아버지댁에서는 항상 대문을 잠그고 살아야 했다. 오빠가 의용군에 끌려가지 않도록 몸을 숨겨야 했고, 언니도 여성 동맹에 가담하지 않도록 숨어있어야 했다. 어느 누구라도 아무리 급하게 대문을 열라고 두드려도 언니와 오빠가 몸을 숨긴 후에야 어린 내가 ‘누구세요?’하며 천천히 문을 열러 나가곤 했다. 수시로 인민군들이 가택 수색을 나왔다. 그들의 눈은 항상 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우리는 항상 공포에 떨어야만 했다. 한 번은 인민재판이 있다고 한 집도 빠짐없이 참석하라는 전갈이 왔다. 참석하지 않으면 사상이 불순한 반동으로 몰린다고 했다. 어린 내가 우리 집을 대표해서 참석했다. 인민의 피를 빨아 먹던 반동분자를 재판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포승에 묶인 한 젊은 남자를 내세웠는데, 나는 그분을 본 후에 기절할 뻔했다. 내 고모부가 끌려나와 서 있는 것이었다. 수염은 깍지도 못하여 덥수룩이 자라있었고, 마루 밑에 숨어 있다가 잡혀왔는지 바싹 마른 얼굴은 햇빛을 못 보아 쉬어 있었다. 고모부는 순경이었기 때문에 벌써 남하한 줄 알고 있었는데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모양이다. 그분은 ‘인민의 피를 빨아 먹은 자’가 아니었다. ‘민중의 지팡이’로 표창을 받으신 분이었다. 가슴이 울렁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 악질분자는 총살형에 처해야 하갔디오?” 구레나룻이 시꺼먼 빨간 완장을 두른 인민 위원이 외치니까 모인 군중들은 “옳소! 옳소!” 모두 오른손을 주먹 쥐어 올리면서 외치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나를 대신 내보내시면서 ‘너는 남들이 하는 대로 똑같이만 하면 된다.’고 일러주신 말씀이 떠올랐지만, 나는 도저히 남들과 똑같이 행동할 수가 없었다. 나는 깔고 앉았던 운동화를 걷어들고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닙니다! 저분은 악질분자가 아닙니다! 저분은 내가 잘 압니다! 내 고모부니까요!” 나는 마음속에서 북받치는 말을 뱉고 나니, 속이 후련하였다. 힘차게 부르짖고 주위를 둘러보니, 군중 모두가 나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벌게진 우두머리 인민 위원이 소리쳤다. “저, 간나 새끼를 묶으라요!” 어디서 나타났는지 붉은 완장을 두른 인민 위원 서너 명이 곧 내게로 다가와서 거칠게 내 팔을 낚아채며 나를 단상으로 올렸다. “보라우요! 반동분자 새끼들은 어린 조카까지도 악질인 거, 보셨디오?” 고모부는 앞으로 묶인 두 손을 입가로 올리고 검지를 펴서 자기 입에 대고는 고개를 저으며 내가 또 다른 발언을 할까봐서 애처롭게 나의 입을 막고 있었다. 그런 그분을 그들은 총살로 처형하려고 몰고 나갔다. 군중이 흩어지고 나는 조사실로 끌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끌려왔다. 그들은 ‘자식 사상 교육을 어떻게 시켰기에 자식이 반동발언을 서슴지 않느냐’고 하면서 내 부모님께 발길질을 했다. 어머니의 허약한 체구는 몸을 옹그리며 매를 맞았고, 아버지의 가는 허리는 그들의 발길질에 꺾였다. 나는 가슴이 미어졌다. 즉석에서 부모님께는 강제 노동형벌이 내려져서 앞으로 3 개월간 방공호 파는 작업에서 솔선수범하라고 하면서, 어린 나는 풀어주었다. 나의 뿔뚝 성질 때문에 억울하게도 내 부모님은 이튿날부터 아침 6시에 나가서 저녁 8시까지 부역에 참여하게 되었다. 낮에 점심으로 보리콩밥이 한 덩어리씩이 나왔는데, 부모님은 한 덩어리를 두 분이 나눠 드시고, 한 덩어리는 집으로 숨겨 오셔서, 물을 한 솥 붓고 보리죽으로 끓여서 우리들의 저녁으로 때웠다. 양식이 떨어져서 굶게 되었다. 우리는 돈은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빨간 색 북한 돈만 통용되었기에 쓸 수가 없었다. 그동안에는 어머니의 금비녀나 금가락지로 물물 교환하여 양식을 마련해 왔지만 이제는 그것도 불가능해졌다. 인민부에서 곡물을 공출해 갔다는 것이다. 고모는 우리보다 서울 시내에서 오래 살았기에 그곳 곡물상과는 깊은 인연이 있을 것으로 보고, 언니와 내가 고모댁으로 양식을 구하러 가기로 했다. 여자 둘이 가서는 얼마 못 가지고 온다고 하면서, 고모부가 처형된 후 슬픔에 잠겨있는 고모님도 위로할 겸 오빠가 가기를 자청했다. 식구가 모두 반대했지만, 한창 나이에 집에만 갇혀 있기에 숨이 막힐 것 같다고 하면서, 낮에는 인민군들이 가택 수색에 동원 되느라고 직행으로 달리는 전차에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애원하는 오빠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빠와 나는 불안한 마음으로 고모댁으로 향했다. 그러나 오빠는 고모댁에 거의 도착했을 때에 내무서원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서대문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젊은 청년들이 많이 잡혀와 있었다. 오빠를 데리고 그들이 학교로 들어섰다. 나도 따라 들어가려 하니, 그 중의 한 명이 막아섰다.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오빠와 헤어졌다. 내가 목 놓아 우니까, 수위실 경비가 어디에다 전화를 거는 것이 보였다. 조금 있더니 장교인 듯한 인민군 한 명이 운동장으로 걸어 나왔다. 그런데 어디서 본 얼굴이다. 군인으로 뽑혀 나갔던 수용오빠 같았다. 전보다는 조금은 여윈 듯했지만 틀림없는 수용오빠였다. 훤칠한 키며 부리부리한 눈망울이며 옛 모습 그대로였다. 반가웠지만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어떻게 군인이 적군이 되어 나타나는가?’ 이해할 수는 없었으나 지금 나는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도 나를 알아보았다. “영아 아니니?” “오빠가, 저기 영철 오빠가…….” 나는 울면서 뒷줄에 엉거주춤 서 있는 오빠를 가리켰다. 그가 곧 오빠 곁으로 갔다. 오빠와 동행한 내무서원과 한동안 얘기하더니, 오빠를 데리고 나왔다. 우리끼리 다니는 것은 위험한 일이니, 수용오빠가 동행하겠다고 나섰다. 가까운 고모댁으로 가서 양식을 구하여 두 남자가 한 자루씩 메고 동대문 우리 집까지 동행해 주었다. 자기는 바로 근무처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면서 반갑게 만난 언니와는 몇 마디 말도 나누지 못하고 돌아섰다. 수용오빠는 군인으로 나가 싸우다가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다시 인민군 옷을 입혀서 전선에 투입되었다고 한다. 그 후로 수용오빠는 틈만 있으면 언니를 찾아왔다. 올 때마다 밀가루나 의약품들을 가져왔다. 식품부와 위생부를 관리하고 있어서 가능하다고 했다. 그 와중에서 수용오빠는 우리의 구세주였다. 수용오빠의 아버지가 충직하게 우리의 고향집을 지키다가 폭격에 희생되었다는 소식을 우리도 들었기 때문에 부모님들은 언니와의 교제를 굳이 막지 않으셨다. 그러나 할아버님은 마뜩찮게 생각하셨다. 그래서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며 두 젊은이들이 날이 어두워지면 낙산을 한 바퀴 돌며 산책을 하는 날에는 나는 언니의 충실한 보호자가 되기도 했다. 언니가 늦게 돌아올 때 할아버지가 깨지 않으시도록 대문을 열어줘야 했으므로 나는 언니의 낮은 음성을 기다리며 대문 곁을 지키기도 했다. 언니는 항상 흥분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나에게 떨리는 가슴을 털어놓기도 했다. “첫 키스를 했어. 얼마나 황홀했던지……. 세상이 모두 달라 보인다, 영아야!” 하며 언니는 몸을 떨었다. 양로원 내부의 세계는 외부와는 너무나 달랐다. 밖의 세상은 생동하는 봄을 맞이하고 있지만, 양로원 내부의 세상은 낙엽 지는 가을 같았다. 며칠 전까지도 인사를 나누었던 일층 끝 방의 노인이 낙엽 지듯이 떠났다. 그 방에 새로 노신사가 들어오셨다고 한다. 흰 가운을 입은 의사나 간호사는 ‘죽음’에 대해서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늘 미소를 짓는가 보다. 곧 떠날 분들이기에 더욱 친절하게, 최선을 다해서 사랑을 보이고 있었다. 지난달에는 동부에서 근무하는 언니의 아들이 방문했다. 조카는 잠들어 있는 언니를 깨우려고 큰 소리로 불렀다. “어머니ㅡ!” 그랬더니, 옆 침대의 노인들 세 분이 동시에 벌떡 몸을 일으킨다. 자기 아들들이 찾아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몸을 반쯤 일으키고 부산하게 머리를 매만지거나 옷깃을 여미면서 아들을 맞을 준비를 하다가, 자기 자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힘없이 다시 옆으로 몸을 눕히는 노인들의 굽은 등을 보면서 나는 눈물을 삼켰다. 곧 나도 그들과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될 터이므로, 마치 나의 미래를 보는 듯했다. ‘어머니ㅡ’ 얼마나 고귀한 이름인가? 얼마나 듣고 싶은 자녀의 음성인가? 나는 언니가 오히려 치매 상태에 있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매화 향기에 취하여 그리움이나 괴로움에서 해방되어 있는 언니를 차라리 다행스럽게 생각하기로 했다. 내일은 언니를 모시고 봄의 생기가 감도는 봄꽃이 만발한 정원으로 안내를 해야겠다. 언니가 화단을 가꾸는 일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 해 8월의 한여름 더위는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언니와 오빠는 겨울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트랜지스터라디오의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미국의 맥아더 장군의 작전 하에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했고, 드디어 9월 27일에 서울의 남산과 낙산에서 서울 시내를 사이에 두고 공산 진영과 민주 진영이 마주 서게 된다고 한다. 그날 저녁에 양측의 교전이 있을 것이라는 소식을 우리는 방송을 통하여 알고 있었다. 9월 27일 저녁 시간이었다. 누가 대문을 조용히 흔들었다. 나는 언니와 오빠가 숨은 뒤에 천천히 대문을 열었다. 뜻밖에도 수용오빠가 냉수 한 그릇을 청하고 있었다. 몹시 그가 지쳐보였다. 각 동회로 배치되어 있던 인민군들은 모두 낙산으로 집합하라고 해서 서대문에서부터 걸어왔다는 것이다. 이제 날이 어두워지면 우리 국군이 낙산으로 대포를 쏠 것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우리 오빠를 구해준 수용오빠에게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 얼른 판단이 서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수용오빠를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오빠는 목이 마른 것이 아니고, 배가 고픈 것 같다. 들어오세요!” 나는 대문을 활짝 열었다. “내가 얼른 밥을 해 드릴 터이니, 잡숫고 떠나세요. 오늘도 부모님은 부역에 나가고 안 계셨다. 나는 밥을 짓는 척, 되도록 시간을 끌 었다. 일부러 ‘수용오빠’를 큰 소리로 불러서 언니와 오빠가 수용오빠가 온 것을 알 수 있게 했다. 다락에서 솜이불을 덮어쓰고 숨어 있던 언니가 내려왔다. 청소도구를 넣어두는 변소 뒤칸에서 분뇨 냄새를 맡으며 숨어있던 오빠도 나왔다. 오빠는 수용오빠에게 라디오로 들은 정세를 알려 주었다. 지금 낙산으로 가는 것은 무덤 으로 가는 길임을 알려서 포기하도록 설득했다. 언니는 오빠 옆에서 말없이 애원의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안 가면 전 가족을 총살시킨다고 했는데……. ” 망설이는 수용오빠는 언니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가족과 애인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드디어 남기로 결정하자 오빠는 자기 옷을 가지고 나와서 수용오빠의 인민군 옷을 벗기고 갈아 입혔다. 나는 다시 망을 보고 언니가 저녁을 차렸다. 그때 대문이 또다시 흔들렸다. 우리가 긴장을 하고 있는데, 조그맣게 어머니의 음성이 들렸다. “엄마다. 문 열어라.” 오늘은 감독관도 안 나오고 부역에 참여한 자도 몇 명 안 되어서 도망 나오셨단다. 부모님이 수용오빠를 보고 놀라셨다. 정세 소식과 함께 수용오빠의 경위를 말씀 드렸더니, ‘참 잘했다’고 칭찬해 주셨다. 우리는 저녁에 벌어질 전투에 대비했다. 주먹밥을 만들어 각자의 가방에 분배했고, 약간의 돈과 옷가지도 넣었다. 약품도 나누어 챙겼다. 옷은 되도록 두꺼운 겨울옷으로 입었다. 파편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모두 활동하기 좋도록 바지차림이었다. 오빠는 할아버지와 짝이 되어 안전을 책임지기로 했다. 아버님은 어머님을, 언니와 수용 오빠는 나를 책임지겠다고 했다. 나는 언니의 손을, 수용오빠는 언니의 손을 잡았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쌍방에서 대포를 쏘기 시작했다. 집이 흔들리자 온 동네 사람들은 집이 무너져 깔리는 것을 피하려고 골목으로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만일 헤어지더라도 최선을 다해 안전지대로 갈 것이며, 내일 다시 집에서 만나자고 약속을 했다. “피-웅ㅡ!” 하며 박격 포탄이 날아가는 소리가 들리면 조금 뒤에는 천지를 흔드는 폭발음이 들린다. 뒤의 낙산에 포탄이 떨어지면 파편이 우두둑 우두둑 떨어진다. 우리들은 이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을 확률이 높았다. 아군 비행기가 뜨면 시가지에 파 놓은 방공호에서 인민군이 대포와 기관총으로 대응하는 총소리가 요란하다. 시가전이 벌어져서 이곳저곳에서 불길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시가로 나가면 안 되었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몰려다니며 안전한 곳을 찾아 헤맸다. 우리 식구도 많은 인파에 휩쓸려 헤어졌다. 파편에 맞은 어머니를 붙잡고 식구들이 ‘어머니! 어머니!’ 아우성치며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가족도 보였다. 어디인지 인파에 휩쓸려 정신없이 내려왔을 때 언니가 하수도 구멍이 노출되어 있는 곳을 발견했다. 언니는 나에게 그 구멍으로 들어가라고 강요했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데…….” 망설이는 나에게 “아니면, 죽어! 지금 냄새가 문제야?” 하면서 내 엉덩이를 발로 차서 나를 하수도 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얌전하던 언니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났는지 모르겠다. 나는 코를 막고 그 하수도 구멍 깊이 기어들어갔다. 언니와 수용오빠도 뒤따라 들어왔다. 코를 막을 것이 아니라, 눈과 귀를 막아야 포탄의 위력에서 보호받을 수 있다고 수용오빠가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엎드려서 눈과 귀를 막았다. 밤새도록 포격은 계속 되었다. 남산에서는 낙산을 향하여, 낙산에서는 남산을 향하여. 새벽 동이 틀 무렵에 포성이 그쳤다. 잠잠했다. 하수구 끝자리에 있던 수용오빠가 하수구에서 나갔다 오더니 우리를 불렀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숨어 있던 곳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거의 시가전이 벌어졌던 동네까지 내려와 있었다. 집으로 향하려고 허리를 펴고 둘러보니, 동대문부터 서대문까지가 한눈에 들어왔다. 폭격으로 전소하여 남아있는 건물이 하나도 없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가게 건물도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길가 방공호에서는 연기가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가까이 가 본 사람들은 방공호 안에는 불탄 시체가 가득하다고 전했다. 우리의 온몸에서는 악취가 진동했고 옷은 형편없이 더럽혀져 있었다. 그래도 이 전쟁터에서 안전했던 것이 행운이었다. 할아버지 집은 아래채 지붕이 날아갔고, 다른 집들도 부분적으로는 파손되었으나 전소한 집은 없었다. 아군이 일반인 집에는 포격을 삼갔던 것이다. 집에 도착하니, 부모님과 오빠가 반겨주셨다. 그러나 불행한 일은 할아버지가 파편에 발등을 다치셔서 누워 계셨다. 할아버지는 수용오빠가 전심으로 돌봐 드렸다. 전에 수용오빠가 의약품을 갖다 놓은 것이 유용하게 쓰였다. 성실한 수용오빠의 간호에 할아버지의 눈길도 점차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다시 솜이불을 쓰고 뉴스를 듣던 오빠가 소리쳤다. “우리가 이겼습니다! 국군이 이겼대요! 두 시간 후에는 중앙청에 태극기를 올린답니다!” 눈물이 글썽해진 오빠가 두 손을 높이 들고 외쳤다. 우리는 함성을 지르며 서로 얼싸 안았다. “우리, 태극기를 그리자!” 내가 외쳤다. 우리는 시간이 없었다. 도화지에 둥근 원을 그리고 아래위로 붉은 색과 남색을 칠했다. 그리고 네 귀퉁이에는 구별 없이 검은 색으로 작대기 세 개씩을 그렸다. 언니와 내가 태극기를 들고 시내로 뛰어나갔다. 벌써 많은 인파가 국군 과 U. N군을 환영하고 있었다. 중앙청에는 태극기가 자랑스럽게 휘날리고 있었고 군중 중에는 언제 준비했는지 제대로 된 태극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군복과 철모에 나뭇잎을 꽂은 채로, 진흙을 묻힌 채로 U. N군과 국군들은 시민들과 악수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인파를 헤치고 앞자리로 나섰다. 나도 한 국군 아저씨와 악수를 하였다. 어느 할아버지가 국군의 손을 잡아 흔들며 울면서 호소하고 있었다. “내 손자가 지금껏 잘 숨어 있었는데, 한 시간 전에 잡혀갔어! 어서 뒤따라가서 구해줘요!” 나는 가슴이 아팠다. 내 오빠의 일처럼 생각되어 눈물이 나왔다. U. N군들은 시민들과 악수를 하면서 ‘땡큐! 땡큐!'를 연발하고 있었다. ‘잘 참아주어서 고맙다’는 뜻인 것 같다. 우리 시민들도 ‘땡큐! 땡큐!'를 연발하고 있었다. ‘자유를 찾아 주어서 고맙다’는 뜻일 것이다. ‘자유! 자유가 이리도 좋은 것을…! 자유가 이리도 귀한 것을…!’ 언니와 나는 유쾌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한 반공 청년단’이라고 쓴 완장을 두른 청년들이 집 마당에 가득했다. 우리가 국군을 환영하는 동안, 이들은 정보에 따라 공산 치하에서 활동하던 공산당원들을 색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청년들은 수용오빠를 무릎을 꿇리고 발길질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도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아마도 공산당에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일 것이다.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돌연 내 가슴 속으로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솟구쳤다. 도대체 우리는 지금 동족끼리 서로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인가? 왜 우리는 이래야만 하는가? 사상이 무엇이기에 인간을 벌레보다 못하게 죽이고 서로에게 상처를 내며 피를 내뿜고 있는 것인가? 내 아둔한 머리로 정리할 수는 없었지만, 이 세상은 확실히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오빠가 수용오빠를 위해서 열심히 변호하고 있었다. “이분은 국군 포로였습니다. 공산당 치하에서도 인민군으로 끌려가는 나를 구해준 분입니다.” “할 말이 있으면 ‘반공 청년단 사무실’로 오시오!” 그들 중 높은 사람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들은 무조건 수용오빠를 결박해 끌고 갔다. 개같이 끌려가면서도 수용오빠는 고개를 돌려 눈으로 언니를 찾고 있었다. 언니와 눈이 마주치자 그가 크게 소리쳤다. “영애 씨, 사랑해ㅡ!”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언니가 나는 듯이 달려가서 열정적으로 수용오빠의 품에 안기고 있었다. 수선화 같았던 젊은 날의 내 언니는 아름다운 첫사랑의 열매를 맺지 못한 채, 이제는 양로원에서 과거를 잊고 매화 향기 속에 취해 있다. 언니가 잠든 사이에 나는 언니의 서랍은 열어 보았다. 거기에는 낡은 공책 한 권이 있었다. 무심코 읽어 보았다. ‘사랑하는 수용 씨...’로 시작되는 편지 형식의 글은 언니가 수용오빠와 헤어진 후부터 결혼 전까지 써가던 ‘사랑의 목마름’이었다. 어찌해서 이 공책이 아직 까지도 언니가 간직하고 있었는지를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살며시 다시 그 ‘사랑’을 서랍에 보관하였다. 오늘은 참으로 따뜻한 날씨다. 언니가 잠에서 깨어나자 나는 언니를 모시고 산책에 나섰다. 언니가 요새는 식사량이 많이 줄었고 힘이 없어 보여서 햇볕을 쪼여드리고 싶었다. 휠체어에 태운 후에 두꺼운 담요를 둘렀다. 분수대에서는 여전히 물줄기가 솟구치고 있었다. 또 한 분의 노신사가 휠체어를 타고서 분수대를 돌고 있었다. 새로 오신 분인 것 같다. 언니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즐거워 했다. 나는 언니를 매화나무 밑으로 옮기려고 휠체어를 돌리는데 갑자기 언니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수용 씨!” 나는 걸음을 멈췄다. 언니는 덮고 있던 담요를 떨어뜨린 채 우뚝 서 있었다. 언니 의 눈길을 따라 나도 바라보았다. 분수대를 돌고 있는 또 한 대의 휠체어에 계신 노신사에게 언니의 시선은 멈추어 있었다. 그분은 많이 변해 있었다. 그 멋졌던 모습은 찾을 길 없고 많이 수척해 있었다. 나도 못 알아본 그분을 언니가 먼저 알아본 것이다. 그것도 제정신으로. “혹시 수용 오빠…?” 그분은 나를 찬찬히 살피셨다. “언니는 안녕하신가…?” 그분은 나를 알아보셨다. 그리고 60년 전 옛 사랑을 기억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내가 언니 옆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듯했다. 언니도 그처럼 변해 있었나 보다. “언니! 언니가 바로 보았어. 바로 수용오빠야!” 그러나 언니의 표정은 덤덤해져 있었다. 언니의 눈은 다시 꿈속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제야 수용오빠는 언니를 알아보고는 조용히 다가와서 언니의 손을 잡았다. 언니가 기겁을 하며 손을 빼냈다. 노신사의 눈에서는 굵은 눈물방울이 후드득 흘러내렸다. 우리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흘러내리는 분수처럼 덧없이 흘러가버린 세월을 바라보며 한참을 말없이 마주하고 있었다. 노신사는 그 후에 매일 언니의 침상을 찾았다. 그러나 언니는 다시는 옛 사랑을 기억해내지 못했다. 삼 개월 후에 언니는 세상을 떠났다. 언니의 장례식에 수용오빠는 휠체어의 몸으로 장지까지 따라와서 언니를 배웅해 주었다. 나는 그날 수용오빠에게 언니가 고이 간직했던 공책을 전해 주었다. 이제 수용오빠는 매화의 전설에 나오는 ‘휘파람새’가 되어 언니 곁을 지키게 될 것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을 그리워하며 언제까지 나 매화나무 곁을 떠나지 않았다는 전설의 새처럼……. ▶수상소감 1950년 6월 26일 월요일 아침, 저는 평소대로 등교를 하였지요. 아침공부가 시작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담임선생님이 교실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천진한 어린 우리들은 공부하지 않는다고 좋다고 책상을 두드리며 떠들었지요, 교무회의를 끝내시고 교실로 오신 선생님은 엄숙하고도 슬픈 표정으로, “지금부터 내 말을 잘 들어라. 오늘 수업은 없다.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데, 길에서 놀지 말고, 곧장 집으로 가야 한다!” 이렇게 황급하게 우리는 선생님과 급우들과 헤어진 것이 마지막 이별이 되고 말았습니다. 민족상잔의 비극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반세기가 넘도록 우리는 ‘조국 통일’을 염원하고 있습니다. 제 이 적은 <증언>이 어찌 민족의 큰 비극을 대언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이제는 부디 주님의 공의를 펼쳐주옵소서! 제 보잘것없는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께 깊이 감사 드리며, 더욱 좋은 글로 보답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2014-05-20

[중앙신인문학상/논픽션 부문-가작] 나의 새로운 삶

그제야 긴 한숨을 쉬어보았다. 이제 살았구나 하는 확신이 섰다. 7월4일은, 미국에선 제일 큰 명절이기에 이 나라의 지난날과 앞날의 축복을 기원하는 폭죽들의 축제가 시카고 다운타운과 각 지역에서 벌어졌다. 그 다음날인 2002년 7월5일 아침 10시30분, 간밤의 환희만큼이나 나에게 커다란 사고가 생길 줄은 아무도 상상도 하지 않았다. 10분간은 삶과 죽음을 가름하는 순간이었다. 죽어야하는 절망의 고통 속에서 눈물 흘리며 드린 기도가 하느님께 상달 되어 살려주신 것이었다. 나는 개인 개인강철회사에서 24년간 기계 보수 요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여러분이나 저나 기계문명이 첨예화된 현대는 어느 순간, 어디에서나 사고의 위험성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우리 회사의 집 채 만 한 기계를 본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잘 버티어나갔다.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이민생활을 하는 동안 세 번의 고난과 환난을 당하기도 했다. 첫 번째는, 회사에서 기계를 분해하다가 피스톤이 튀어 나와 배를 가격했다. 이 사고로 죽을 뻔했지만 무사하였다. 이 사고로 장 검사 때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는데, 내 배에서는 항상 봄이 오는 소리가 난다며 내 부인은 나를 웃겼다. 두 번째는, 전도 폭발 훈련을 하면서 자녀문제로 가정에 시험을 당하였지만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무사히 이길 힘을 주셔서 믿음 위에 섰다. 세 번째는, 지난번 안수집사 임직을 받은 후 이렇게 사고를 당하여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려 주심으로 승리하게 하셨다. 유압으로 작동하는 프레스(press)로서 램(ram)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열처리에서 나온 달구어진 쇳덩이를 기둥모양, 동그랗게, 네모나게 등 여러 종류의 모양으로 눌러서 모양(forging)을 만드는 기계였다. 나는 20년 이상 이 기계를 분해하여 수리하고 부속도 갈아 끼우고 했다. 프레스의 높이는 집 덩이만한 지상으로부터 20피트 이상에 위치해 있었다. 사람 키의 세 배가 넘는다. 2. 우리 회사는 일 년에 한 번씩 회사 일을 중단하고, 여러 가지 기계들을 보수 및 점검을 했다. 예년과 같이 그해에는, 10일간의 공정으로 프레스를 분해 수리하던 중이었다. 그날 할 일은 메인 실린더(main cylinder)와 철판을 연결하여 끌어올리는 작업이었다. 10피트 높이의 프레스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허리를 굽혀 머리와 양쪽 팔로 엎드려서 연결하던 중이였다. 그런데 머리 위에 있던 철판이 순식간에 쿵하면서 떨어져 머리의 뒤쪽 목과 양쪽 팔이 잘리기 직전에 '탁'하고 멈추었다. 그 순간에 올려져 있던 철판이 멈추지 않았더라면 나는 간단히 목이 잘리었을 것이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나는 죽지 않았고, 왜 이 일반 승용차 무게만한 철판이 떨어졌는지. 또 기름이 모두 없어진 상태가 아니었는데, 두 개의 pull back cylinder에 연결되어있고, 누가 조작할 수 없었는데.”하고 생각했다. 나는 목을 쳐들어 보았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이 철판이 떨어진 상태에서 정지한 후, 한참 후에 조금씩 내 목을 조이면서 서서히 내려오고 있었다. “아차, 이제는 죽는구나!” 몸을 비틀고 몸부림쳐보았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고, 사다리에 걸쳤던 다리는 허공에서 버둥거려야 했다. 육십 평생 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던 육체인데……. 더구나 목을 움직일 수 없으니까 진땀이 나고 소름이 끼치며 숨이 가빠지기 시작하면서 숨을 몰아쉬기 시작하였다. 점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나는 생각했다. “나의 손때가 묻은 이 프레스에 의해 죽어 가야 하는구나, 과연 내가 이 상황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Mike나 Rich또는Tony가 빨리 철판을 들어 올려야하는데 그들이 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죽어가는 나를 생각해 보았다. 누가 그때의 심경을 이해나 할 수 있었을까? 머리가 일그러지고 깨지면서 목줄마저 눌리는 순간 피를 토하고 두 팔이 잘려 죽어야하는 순간이라 생각하니 미칠 것 같고 질식해 버리고 말 것 같았다. “20년 이상 내 몸과 같이 만지고 아기같이 다루던 이 기계가 내 목과 두 팔을 자르려고 서서히 내려오는구나.” 3. 내 머리에서는 나의 일생이 끊이지 않는 한편의 필름이 되어 돌아가며 나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죽어야하는 내 모습의 끔찍함, 가족 아내와 자식들 또 부모형제의 얼굴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부르짖는 소리가 있었다. “주여! 주여!” 절규하면서 주님을 찾았다. “나는 이제 죽어야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때에 부르는 ‘주님’에는 많은 뜻이 포함되어 있었다. “저를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그동안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저의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님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그러나 살려주실 수 있으시면 살고 싶습니다. 주님! 주님!” 목은 조여 오고 숨 쉬는 것이 거북스러워지고 다른 어떤 생각이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계속 주님만 불렀다. 그리고 삶을 포기해야만 했다. 나의 목줄을 짓눌려 오는 기계의 무게는 내가 아무리 발버둥쳐도 거스르거나 재껴 낼 수가 없었다. 숨이 느려지더니 심호흡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 목안에선 피가 맺혀 숨을 쉬려도 힘들어지고, 들여 마시는 숨은 더 힘들었다. 몸에서 힘이 점 점 빠져나갔다.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데 같이 일하는 동료 Rich가 사다리에 올라와 내 양다리를 흔들고 꼬집으며 “일어나, 일어나(wake up wake up).”하고 고함치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느끼며 순간에 긴장이 풀어지며 정신이 몽롱해 졌다. 직원들이 기계로 철판을 들어올렸을 때 나는 이미 정신을 잃고 말았다. 질식한 상태였다. 아마도 1, 2분만 늦었으면 나는 내려오는 철판에 짓눌려 목이 잘렸을 것이었다. Rich 얘기로는 내가 죽었었다고 말했다. 그 친구가 축 늘어진 내 몸뚱이를 어깨에 메고 사다리에서 내려와 앰뷸런스에 인계했고 David는 잘린 내 목과 팔을 찾으려고 두 리 번 거리며 살폈다고도 했다. 4. 이 순간적인 사고는 십여분이었는데 십 년이나 이 십 년이 지난 것 같았다. 후에 들으니 시카고 TV 오후 뉴스엔 내가 철판에 눌려서 사망했다고 하며 사고 현장을 방영했다가 정정하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회사직원들은 사고가 난 곳을 돌아보고 모두 기적이라고 감탄했다. 철판이 떨어졌으면 끝까지 떨어져 목이 달아났을 것인데 왜 정지했을까? 회사 직원들은 문병 와서 자유로이 말했다. 어떤 이는 아마도 천사가 내려와서 철판 둘레의 뭉툭한 곳flange을 손가락으로 잡아서 살려냈다고 하기도하며, 어떤 이는 내가 슈퍼맨이라며 슈퍼맨 만화책을 놓고 가기도 했다. 어떤 직원은 그 당시 내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누구를 찾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내가 ‘주님을 불렀다’고 했더니 내 손을 잡고 하염없는 눈물로 기도를 드리고 돌아갔다. 이것이 기적인가요. 믿지 않는 사람들은 기적일지 모르지만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역사 하셔서 살려 주신 것이라 말했다. 이제부터는 나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고 하신 것이었다. 꼭 일 년이 지난 오늘, 60평생을 살았지만 나의 나이는 한 살이라는 생각해 보았다. 지난날들 가졌던 내 생각은 아득한 과거일 뿐이었다.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나, 시야로 보는 사물들은 온통 새로워 보이는 것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우선 성격도 활달하다고 생각했는데, 남들이 보기에는 공격적이라 보였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면에서 방어 자세로 변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한번 죽음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 살아가면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겪지 않는 사람이 없듯이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5. 무릇 사람들은 산다는 그 자체는 끈임 없는 시작이요 즐거움이고, 죽는다는 것은 슬픔이라 표현하고 있다. 지구에 있는 생태계에서 느릴 수 있는 최상과의 단절이라 할 수 있다. 내 인생의 숱한 기억 중에 PRESS 기계에 눌려 죽어가야 하는 10분간의 물리적인 체험은 나로 하여금 또 다른 인생을 시작하게 하였다. 내가 그동안 살아온 과정을 되돌아보고 앞으로 나의 갈 길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나는 오래전의 일을 생각했다.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다녔고 부모님은 시골에서 사셨다. 둘째 형은 군에 가 있었고, 부모님은 나를 도울 능력이 없어 나는 신문을 돌리며 고학을 했다. 어떤 때는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이 없어 한강 백사장에 앉아 울며 죽음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이대로 죽을 수 없어. 하나님은 분명히 내 갈 길을 열어주시리라 믿고 열심히 공부하고 군대를 다녀와 한국전력에 시험을 보고 합격하였다. 더 넓은 세상에서 다른 기회를 얻고자 이민을 왔다. 그런데 지금 나는. 죽는구나! 죽어가야 하는구나! 누구나 한번은 죽는 것이지만 물리적인 절망적인 죽음의 상황에서 내가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을 찾으며, 내 영혼을 의탁해야 하는 절박한 순간에 찾던 그 분을 향한 믿음을 간직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지만 믿음생활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민 와서도 성경책이나 들고 일요일이면 왔다 갔다 하는 나일론신자, 즉 교회에 소속된 한 사람의 교인에 불과했다. 나이가 들면서 나는 모든 삶을 하나님께 의지하며, 경건하게 살아 믿음을 키우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였다. 생각하면 이민 25년간은 살기 위한 전쟁이었다고 고백하고 싶다. 내 의지, 내 노력, 또 내 힘으로만 살려고 발버둥친 강행군이었다.이 공장에선 위아래도 없다. 아들 같은 놈이 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욕을 하는 것은 다반사다. 6. 우리 두 아들은 대학 때, 썸머잡으로 우리 회사에서 일했다. 우리 큰아들이 일을 해 첫 봉급을 받던 날, 한국에 계시는 할머니께 보내라며 $200.00을 주는데, 난 그 돈을 받고 돌아서서 울었다. 일이 주어지면 일요일도 마다 않던 그야말로 일 벌레처럼 무척이나 억척스럽게 살았다. 나는 일 년 전 사고 후유증인 왼쪽 귀의 이명증으로 지금도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신경과에서는 노인들의 보청기처럼 귀에다 청각을 안정시키는 Hearing System Remote Control을 만들어 주어, 소음을 상쇄해 주기는 하지만 큰 도움이 되지 못해 언제나 짜증이 나고 노이로제에 걸려 무언가 불안해 안절부절 못하는 증상에 시달리고 있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머리가 아파온다. 그런가 하면 나 자신이 너무 힘들어 질 때면 그런 이명의 현상으로 자살을 한다는데 그러고 싶은 생각이 들만도 하다. 누구와의 대화도 제대로 나눌 수 없고, 들을 수 없으니 그냥 멍해져, 누가 의견을 물어도 이해를 못 해 그냥 웃어넘길 때가 많거나 묵살해 버릴 때도 있고, 동문서답까지 할 때도 많다. 정신과 의사는 상담할 때마다 아직도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다며 뇌를 피곤치 않게 하라고 주의를 준다. “우선 신경 쓰시는 것을 줄이시고 조용한 상태가 좋습니다. TV를 보다가도 죽는 장면이 나오면 현기증이 나는데요. 그런 장면들은 피하시고 코미디 같은 프로그램을 보시도록 하십시오. 지금은 절대적으로 안정이 필요 합니다. 지금 소홀히 하시면 그 증상들이 길어 짛 수 있으니까요. 또 사다리를 사용하여 하는 일은 안 됩니다. 높은데 올라가지 마십시오. 큰일납니다. 당분간은 엘리베이터도 조심 하십시오. 조그만 공간에 갇히면 두려우실 겁니다. 공황장애를 느끼실 수 있습니다.” 한국 정신과 의사(Mrs. Kim)은 상세히 일러 주었다. 그래서인지 몇 년 후 한국엘 다녀오는데 잘 갔다 올까를 염려했기도 했지만 아내의 배려로 잘 다녀왔다. 조용한 곳에서 자연과 대화하며 안정이, 하나님이 살려주셨는데 무슨 일이 있겠나.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확신도 있기에. 절대적으로 안정이 필요하다 했다. 오늘도 정신과 의사와 물리 치료 의사와의 약속이 있는 날이다. 7. 왼쪽 귀는 회복 불능 판정을 받았지만, 얼마나 더 의사의 도움이 필요 한 것인지 때론 두렵기까지 하다. 그러나 나는 희망이 있다. 현대 의술로는 불가능하다 해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니 “불꽃 같은 눈초리로 나를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며 나의 끝날 까지 나를 인도하신다.”는 믿음이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다. 청력을 잃고 교향곡을 작곡한 베토벤이나, 소아마비로 인한 불구자로 미국 대통령에 네 번이나 당선되어 1930년대의 대공황을 극복하게 하였으며, 지팡이를 짚고 정상회담에 다니면서 처칠과 스탈린 같은 연합 정상 국 회담에 다니며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어 놓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당당한 활동과, 눈과 귀가 열리지 않은 헬렌켈러 여사는 삼일만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하면서도 감동적인 글들을 남기고 간 활동 등은 한쪽 귀의 기능을 잃어서 시달리고 있지만 나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러 일으켜 준다. 해마다 여름이 되면 정원에 정성스럽게 심고 가꿔 만발한 화초를 보며 나를 다시 생각한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나 자신도 모르게 경직된 내 마음에 믿음의 새싹을 주시고 조금씩 자라게 하시며 믿음의 열매를 주시니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일 년 전 그날을 생각하며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피부로 느끼며 은연중에 나에게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고자 한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가 찾는 아버지가 항상 너를 지키며 너와 함께하리라. 주님이시여. 주님의 십자가 앞에 눈물 흘리는 이 죄인의 죄 사하소서 아멘. 나는 일 년에 생일이 두 번 있다. 부모님이 주신 생일이 있고, 하나님이 주신 새 생일이 있어 두 번의 잔치를 해야 한다. 이민 초기의 어려움은 누구나 겪는다. 월부로 비행기 표 갚느라 신경 쓰고, 겨우 천불 가지고 온 것, 아파트 몇 달치 내면서 직장을 찾느라고 시간 많이 보냈으니 몇 푼 안 되는 돈이 달랑달랑하였고, 중고차 한 대라도 사려도 여의치 못해 일 년간 걷기도 하고 버스를 타고다녔다. 그러다가 직장을 잡아서 장사를 마다하고(장사를 배우고 있었음) 한 직장에 25년간 다녔다. 처음 미국공장에 들어가서 적응하는데 시간아 좀 걸렸다. 8. 한국에서 경험해보지 않은 일들이 빈번히 발생했다. 새파랗게 젊은 사람들이 나이가 많거나 말거나 쌍욕들을 하는데 견디기 어려웠다. 그런 세월을 견디며, 퇴직 후 생계보장(benefit과 pension,) 좋고 회사의 급료와 보험 (insurance), 모든 것 만족하면서 정년퇴직까지 다니면 남은 인생의 세월이 보장된다고 열심히 주말에도 일을 했다. 나는 아직까지 골프를 못 친다. 15년 전에 세트를 구입했는데 한 번도 못 치고 말았다. 그런데 세상만사가 나의 뜻, 나의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심히 일한 만큼 세금을 많이 냈으니 내 노후의 생활은 보장될 것이고, 아내과 함께 여가를 즐기며 남들도 돕고 살려 했던 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생각하기도 싫은 사고로 인해서 무지개 같은 꿈을 접어야 했고 현재 장애인으로서 고생한다. 머리 신경의 손상, 왼쪽 귀머거리 소음으로 인한 장애와 이명증, 신경증세, 공포 병으로 잠 못 이루고 후유증으로 치아가 무를 쑥쑥 뽑듯이 빠져나갔다. 회사 다닐 때 동료가 사고로 쇳덩이에 깔려 죽기도 했고, 많은 고통 속에 불구자 된 동료도 있다. 그런 사고가 있을 때마다 불난 집에 불구경하듯 나는 항상 “나는 끔찍한 사고나 일을 당하지 않는다. 자위하면서 나는 예외야!” 나 자신을 옹위하고 구경만 하는 구경꾼이었다. 그러나 운명처럼 나에게 그런 일이 다가온 날. 응급실에 목사님이 오셔서 시편 18편을 가지고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이 꼭 나를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지난 과거, 현재, 미래에도 무슨 일이 어떤 계획을 세우든지 나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주님의 뜻을 구해야지요? 시편 18편 6절 말씀에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마지막 순간 삶을 포기했을 때 그 좌절감이란 참으로 처절했다. 그 때 울부짖으며 회개하며 기도했던 그 순간도 철판은 목을 자꾸 조여 내려오고, 숨이 막혀 소리도 못 지르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그 절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9.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살리셨던 것이다. “확실히 믿습니다.” 왜냐구요? 아직 때가 이르지 못하셨기에 주님의 도구로 사용하시고자 살려 주셨던 것이었다. 집에서 요양하면서 자신에게 묻는다.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 구원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가?” 목사님 또 주위 성도님들에게 묻곤 했습니다. 방방곡곡 다니면서 전도를 하고 순회 간증이라도 해야 하는가? 아니면 단기 선교라도 나가야 하는가? 빨리 실천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다. 타 교회 장로님과 전도에 대해서도 상의했고 계획도 세웠다. 나는 또한 사고로 법정싸움을 해야 했다. 운동도 할 겸 아침 일찍 아내가 하는 세탁소에 가서 일을 봐 줬다. 언제부터인가 파트타임이라도 회사에 나오라는 편지가 왔지만 거절했다. 내 상태로는 소음이 심한 그곳에선 견딜 수 없어서다. 변호사도 어떤 것은 하면 안 된다는 말이 없었다. 부인의 사업장에서 도와 준 것이 화근이 되었다. 나중에 변호사도 깜짝 놀랐지만 때는 늦었다. 어디에다 설치했는지도 몰랐고, 살펴보아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것만 쫒고 있는 사람의 눈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 무슨 핑계를 잡고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재판하러 갔던 날, 내가 세탁소에서 손님과의 행동, 인보이스를 써 준 것이 동영상으로 나오며 세탁소가 부인의 것이라도 일을 할 수 있는 상태인데 회사에서 일하라는 데 거부했다며 부상한 보상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나는 법이 참 불평등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 경우보다 아무것도 아닌 사건에는 몇백 만 불씩 지급하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회사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친 직원이 있었다. 그런데 눈이 와서 집 앞의 눈을 치우는 사진을 찍어 보상은커녕 복직도 되지 않았다. 10. 회사에서 고용한 사설탐정회사는 그런 것만 노려 돈을 버는 직업이니 뭐라 말 할 수 없다. 그러니 내가 5년 동안 그들의 감시를 피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후 우스운 사실은 내가 회사로부터 보상금을 많이 받았는데 그렇게 되었다고 거짓말한다는 얘기 까지 들었다. 세상 사람들의 소리는 나를 더 힘들게 하였다. 하지만 세탁소에 잠시 있다 들어와선, 밖에 앉아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을 보고 있노라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 없었다. 한쪽 머리의 신경이 마비되어 나이가 들수록 머릿속에서 큰 소리가 난다. 교회에서도 피아노와 오르간이 같이 연주하면 머리가 아파서 힘들어 밖으로 나올 때도 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 가면 더욱 힘들다. 서로 막 떠들면 나는 살며시 나와 주차장에서 왔다 갔다 한다. 사람들은 모른다. 내 고통은 나만이 아는 것이고 아내도 자식들도 모르는 아픔을 혼자 감수해야만 한다. 설사하니 가족들이 알면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현재 나는 장애인으로서 무슨 행동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입장이라는 걸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장애인으로서 해야 할 사역을 찾아야지 내 생각 내 계획대로 되나? 어리석게 시간만 낭비하고 욕심이나 부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포인트는?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뜻을 구해야 하지 않을까? 잠언 14장에 보면 사람의 길과 하나님의 길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내 생각과 다르게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용하시고자 하셨다. 교회 새 성전위원으로서 주님의 몸 된 교회에 봉사하게 하신 것이다. 오래전부터, 아니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주님께서는 이 일(성전이전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나를 죽음의 문턱까지 가게 하신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봉사는 길거리 전도도 아니요, 간증으로 영원 구원도 아니요, 해외 선교는 더욱 아니다. 현재 교회 봉사에 지나지 않는 조그마한 일을 주셨던 것이다.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을 나에게도 맡겨 주셨다. 11. 즉, 장애인으로서의 일인 동시에 시간을 봉헌하며, 아는 지식과 기술을 활용하여 성전을 가꾸어가는 안성맞춤이라고 생각한다.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성전이전관계, 건축보수문제 등 아름다운 성전으로 가꾸어 가면서 주님께 기쁨을 드리고 모든 성도님들의 안식과 쉼을 얻고, 새로운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가꾸어 가는 봉사하는 도구 말이다. 앞으로 주님께서는 다른 계획이 있으셔서 어떻게 나를 사용하실지 모르지만 그동안 교회에서 봉사할 때마다 참으로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일했다. 새로운 장소에 교회를 매입하고 입주하면서 교회 현판, 간판, 사인을 만들어서 첫 번째 헌신했다. 눈 속을 걸어서 1.5 mile 되는 메너드(Menards)에 가서 간판 부품을 사오고 (승용차에는 너무 길어서 실을 수가 없으므로) 지하실에서 며칠 걸려서 페인트(painting) 칠을 했고 서삼선 목사님과, 이준하 목사님이 함께 싸인(sign)을 승판했을 때 정말 기뻤다. 새 성전 보수 공사 중 업자(사장님)가 보이지 않아서 대리 감독하며 안전제일을 염두에 두었고 매일매일 출근하여 저녁 어두워 질 때까지 일일이 조사하고 다음날 계획을 구상하면서 하나하나 성전이 아름답게 변하여 가는 과정을 보고 주님께 감사를 드렸다. 항상 나는 “덤으로 사는 삶인데”하면서. 그때 당시 자동차 연료비가 매일 같이 오를 때였지만 걱정하지 않았다. 아내는 하루에 한 번만 교회에 가라고 했지만, 교회 가는 길이 즐거운데 어쩌겠나.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될 것이 없고 힘이 있는데 까지 시간과 기술과 육체를 헌신하여 주님께 기쁨을 드린다는 마음가짐이다. 몇 년 전 겨울. 갑자기 춥고 폭설이 오던 날이었다. 교회 보일러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는데 뭔가 이상이 일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날이 금요일이었다 생각한다. 교회로 달려 가보니 보일러가 고장이 나서 요란한 소리가 나고 교회 전체가 추위로 동파가 날 지경이었다. 남편이 보조할 분을 불렀다. 기계를 뜯어 그 눈이 많이 오는 날, 보조는 부속품을 가지고 고치거나 새로 사오기 위해 떠났다. 와야 할 시간에 눈 때문에 오지 못했다. 밤 11;00 까지 작업해서 보일러가 제대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집사님 댁으로 갔다. 도로는 갑자기 퍼 붓는 눈으로 덮였다. 그때 아내는 간이식하고 한참 어려운 시기였다. 12. 나는 지치기도 했지만, 도로 사정으로 도저히 집에 갈 엄두를 못 내고, 집사님 댁에서 자기로 했다. 그런데 아내는 몸이 아파 밤새도록 고생했다고 했다. 아침이 되어 집에 오니 이건 또 무슨 일인가. 집안이 싸늘했다. 추운 날 우리 집 보일러가 나가 버린 것이다. 집채만한 기계를 만지고 교회 보일러는 고쳐도 정작 내 집의 작은 보일러는 고치지 못했다. 보일러 고치는 사람이 온다는데 환자인 아내는 작은 아들네로 피신을 했다. 간밤부터 집사님 댁에서 힘들던 아내는 응급실로 갔다는 전화를 받기도 했다. 이게 무슨 아이러니한 일인가. 누구나 항상 생활하면서 마음먹은 대로, 계획대로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누군가 내가 필요하다면 나는 기쁜 마음으로 도우려 갈 것이다. 힘 있는 군대가 꼭 이기는 것도 아니고, 권투 선수가 힘이 세다고 꼭 이기는 것도 아니다. "공부 잘 한다고 꼭 성공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우리의 형편과 사정을 다 아시는 주님!" 하나님을 믿는 성도님들은, 내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환난과 역경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의해 일어나고 있다고 믿을 것이다. 나를 예를 들어 오래 전부터 주님께서는 주님의 도구로 사용코자 장애인으로 만들어서 이 교회에서 섬기고 봉사시키고자 계획하신 것이라 믿습니다. 저나 아내는 교회 앞을 지나는 일이 있으면 잠시 들러 구석구석을 살피곤 한다. 여러분도 삶을 뒤돌아보고 주님의 뜻을 구하시면 미래가 보입니다. 현재가 아니더라도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실 것입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역사 하심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분과 나의 고통 속에서도 피어나는 믿음의 씨앗들을 나누고 싶음에서 이글을 올립니다. 하나님이 살려 주셨는데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살아서 역사 하시며 사랑의 손길로 항상 우리를 지켜주심에 감사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고 믿는 사람들을 위해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롬8;28)고 말씀하셨고 또한 '시험을 당할 때 피할 길을 열어주신다'(고전10;3)고 했다. 디모데후서 4장을 잠깐 살펴보면 전도와 인생의 종말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다. 13. 만약 오늘이 나의 인생의 종말이라고 한다면 첫째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요? 예수님은 마지막 33년의 전생을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바울은'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 지켰다'(딤후;4;7-8)고 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생의 종말이 와도 면류관 '의의 면류관'을 받으셔야지요. 저의 건강은 기도와 격려로 모든 것이 협력하여 사랑으로 치료되어가고 있다. 저의 목숨을 살려주신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저의 건강과 앞날도 책임져 주시며 저의 갈 길을 확실히 책임져 주실 것을 믿습니다. 성경말씀 시편 1-6절 말씀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피할 바위시오, 나의 방패시오, 나의 구원의 뿔이시오, 나의 산성이시리로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사망의 줄이 나를 얽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심으로 구원하셨도다'(시편 18;19). 아멘. ▶수상소감 아무리 과학이 발달했어도 우리 주위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저도 그런 위험 속에서 사고를 당하여, 생과 사를 겪으며 살던 이야기입니다. 우리들은 사는 것만이 눈에 보이는 직면한 문제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제가 항상 고치던 기계에 의해 사고를 당했다 보니, 고통과 두려움에 처한 순간에도 이기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LA를 방문하여 시상식에 참석 할 수 있었음에 감사합니다. 중앙일보 관계자들과 심사위원님들의 한 작품 한 작품에 대한 심사평도 감사했습니다. 칠십 년 만에 받은 트로피는 저의 삶을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심사위원이셨던 분들께 다시 감사 드리며, 중앙일보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심사평 이민생활 애환은 모두 소중…작품 우열 가리기 힘들어 이민생활의 애환을 들여다보면서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다룰 수 없는 눈물과 피 땀에 저린 소중한 작품들이기에 우열을 가린다는 것에 부담이 된다. 그래도 그 안에 스민 작품으로의 심층, 농도, 극적인 감동, 적절한 문장력, 구도 등을 기준으로 응모작을 살폈다. 조성길 씨의 ‘나의 새로운 삶’, 조정래 씨의 ‘내 삶의 여정’, 현영아 씨의 ‘증언’, 조희자 씨의 ‘나는 죽으려 했다’, 이춘상 씨의 ‘바보처럼 살아온 무명교사의 소리’ 등 다섯 편을 선상에 놓고 장고 끝에 당선작을 내지 못 한 채 가작으로 눈을 돌린다. 조정래의 ‘내 삶의 여정’ 은 재미있게 일생을 갈무리한 솜씨가 돋보이나 지나친 자서전적 완만한 수법이 시제적, 집중적 논픽션의 효력을 상실해 선외로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이춘상의 ‘바보처럼 살아온 무명교사의 소리’ 는 밀도있게 조리있게 무명교사의 항변을 시대감각적 조항 별로 드러냈지만 논픽션이 갖는 일관성 압축미와 연결의 미흡으로 선외로 돌렸다. 조희자의 ‘나는 죽으려 했다’ 는 충분히 독자의 시선을 끌 만한 수기적 타이틀을 가졌으나 ‘간이식’에 따르는 피상적 개념에 의존한 감이 없지 않아 가작으로 선정할 수 없었다. 조성길의 '나의 새로운 삶'은 서두르지 않고 흥분하지 않은 담백하고 노숙한 관조의 서술로 철판에 눌린 빈사의 기로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정신 위생학적 안목, 종교적 깊은 유대와 접목으로 새로운 삶을 향해가는 차분한 이야기들이 생의 강인한 의지와 안도로 깊은 인상을 주어 가작으로 천거했다. 현영아의 ‘증언’ 은 반소설적 반수기적 작품으로 소설 같은 우발성과 시제를 초월하여 ‘오버랩’되는 수법이 논픽션의 성격을 다소 훼손시키지 않았는가 하는 우려가 있었으나 그래도 능숙한 문장력과 민족의 수난인 6.25의 참상을 목격한 실존자로서 이를 증언하는 소명감이 돋보여 가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홍승주(소설가·시인)

2014-05-20

[중앙신인문학상 / 단편소설 부문] [가작] 산으로 간 기러기

녹화를 앞둔 스튜디오는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사회자는 의상과 화장을 손 보고 있었고, 초대손님은 대본을 보며 조금은 긴장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객석에 있는 주부 방청객들 중 일부는 처음 와본 방송국 모습이 신기한 듯 이리저리 쳐다보며 구경하기 바빴다. “자, 녹화 들어가겠습니다. 스탠바이!” 머리에 헤드폰 마이크를 쓴 조감독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자 실내는 순간, 도서관처럼 조용해졌다. 무대 위에서 사회자를 도와주던 사람들도 어느새 썰물처럼 사라졌고, 무대 앞 방송용 카메라 다섯 대에는 일제히 빨간 불이 들어왔다. “쓰리, 투, 원, 큐!” 조감독의 큐 사인이 떨어지자 대한방송의 인기 프로 '상쾌한 아침'의 경쾌한 시그널 음악이 울려 퍼지며 녹화가 시작됐다.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상쾌한 아침의 이재웅입니다!” “안녕하세요? 홍은아입니다!” 남녀 아나운서의 인사가 끝나자 방청객은 조 감독의 수신호에 따라 열렬히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자, 오늘은 저희 프로에 특별한 손님을 한 분 모셨습니다. 오늘 저희 방송을 보시는 분 중에서 현재 농촌에 사시거나 앞으로 농촌으로 이주하실 계획이 있는 분들은 이분을 통해 유익한 정보를 얻으실 수 있으니 끝까지 채널 고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자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자 여자 사회자가 말을 잇는다. “네, 이분은 농어촌 부흥대회에서 영광의 대상을 수상하고, 그것도 모자라 노동부에서 주관한 일자리 창출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하신 김철수씨입니다.” 여자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초대석에 앉아있던 철수는 밝은 얼굴로 방송 카메라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김철수씨 축하 드립니다!” 남자 사회자가 말했다. “감사합니다!” “김철수씨는 현재, 경남 칠곡군 남진면 진성 2리 이장 님이죠?” “네, 제가 아직 내공이 부족해서 삼장이나 사장은 못 되고 이장입니다.” “하하! 말씀을 참 재미있게 하시네요!” 남자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여자 사회자는 “그러게요, 예능 감이 아주 좋으시네요!”라고 맞장구쳤다. “자, 김철수씨는 어떤 분이시기에 그리고 어떻게 하셨기에 정부에서 주관한 대회에서 연속으로 수상할 수 있었는지 시청자 분들께서 무척 궁금해 하실 것 같습니다.” 남자 사회자가 말했다. “네, 저는 원래 서울에 살다가 3년 전에 농촌으로 내려간 귀농인입니다.” “아니, 귀농을 하셨다고요?” 여자 사회자가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갑자기 농촌으로 내려가시게 된 특별한 동기라고 있으신가요?” 이번에는 남자 사회자가 말했다. “그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3년 전이었습니다…….” 철수가 입가의 미소를 거두고 잠시 뜸을 들이자 사회자와 방청객들은 그의 입에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궁금한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2. 크리스마스가 채 한 달도 남지 않았던 2011년 어느 겨울 밤, 철수는 영안실에 앉아 친구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웃고 있는 원규의 영정사진을 바라보던 철수는 친구를 잃은 슬픔과 답답함을 담배 연기에 얹어 길게 내뿜었다. '휴~' “참, 원규 와이프랑 애들은 다음주나 돼야 온다며?”철수 옆에 앉아있던 친구 재우가 말했다. 철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재우는 목소리 톤을 높여 말을 이었다, “아니, 남편이 죽었는데 애들 기말고사 보고 귀국한다는 게 말이되, 말이 되냐고?” 간간이 창문을 후려치는 차가운 겨울 바람만큼이나 상주 없는 영안실은 차갑고 쓸쓸했다. 철수는 말 없이 담배만 피웠다. 허공에 피어 오른 담배 연기는 마치, 한마디 말도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사라진 원규처럼 영정 사진 앞에 머물던 향 연기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다. 원규는 아내와 아이 둘을 캐나다에 유학 보내고 지난 5년 동안 외로운 기러기 아빠 생활을 했지만 단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가끔 친구를 만나 소주 잔을 부딪칠 때도 그는 늘 웃음을 달고 살았다. 그랬던 친구가 갑자기 생을 마감하자 철수는 더 마음이 아팠다. “남편? 아버지? 우린 그냥 돈 버는 기계일 뿐이야!” 오랜 침묵을 깨고 철수가 입을 열었다. 그는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려고?” 재우가 물었다. “바람 좀 쐬려고……” 영안실 밖으로 나오자 차디찬 겨울 바람이 철수의 얼굴을 때렸다. 답답한 마음을 찬 바람으로 털어내고 싶었을까? 평소 같으면 옷깃을 조였을 텐데 철수는 오히려 코트를 벗어 어깨에 걸쳤다. 새벽 두 시가 넘은 늦은 시간, 세상은 잠들고 거리는 조용했다. 바람에 날려 이리, 저리 나뒹구는 낙엽과 휴지 조각들이 여전히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말해준다. “사는 게 뭔지…….” 혼잣말을 내뱉은 그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원규의 모습이 보였다. 영정 사진처럼 웃고 있는 친근한 그의 모습. 철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그때였다. 등 뒤로 ‘여기 있었구나!’하는 재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철수는 손 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왜 나왔어?” “조문 오는 사람도 없고 답답해서 그리고 네 걱정도 되고……” “내 걱정이라니?” “너도 기러기잖아! 혹시 알아? 너도 원규처럼 엉뚱한 짓 할지? 넌 절대 그러면 안 된다. 나이 마흔다섯에 친구들 줄 초상 지르고 싶지 않으니까, 알았지?” 그랬다. 철수 또한 아내와 아이 둘을 미국에 유학 보내고 혼자 사는 기러기 아빠였다. 처음엔 몰랐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갈수록 '조기유학'이란 명분 하에 소중한 가족이 멀리 떨어져 사는 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끔은 그 또한 원규처럼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싶은 충동이 들기도 했다. “그만 들어가자. 원규 혼자 외롭겠다.” 철수는 재우의 등을 감싸며 말했다. 3. 얼마나 잤을까? 철수는 핸드폰 문자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원규의 장례를 마치고 5일 만에 집에 와 제대로 된 잠을 잔 그는 마치, 악몽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철수는 침대에서 일어나 스탠드 불을 켜고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병 나발을 불기 시작했다. '벌컥벌컥~' 오전 11시쯤 침대에 쓰러졌던 것 같은데 열 평 남짓한 그의 오피스텔 창 밖 세상은 벌써 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침대 옆 책상 위에 있던 핸드폰을 집어들자 시간이 보인다, 'PM 11:07'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철수는 혼자 말을 내뱉었다. 손가락으로 핸드폰 액정을 문지르자 직장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온 안부 문자 등 그가 자는 동안 도착한 문자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대충 문자를 확인한 그는 의자에 앉아 친구 재우의 번호를 눌렀다. 두세 번 신호음이 울리더니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잘 잤냐? 안 그래도 지금 막 전화하려고 했는데…….” “내일 우리 와이프한테 전화하는 거 잊지마!” “나야 네가 시키니까 한다만 철수 네 와이프가 많이 놀랄 텐데 꼭 그래야겠어? 결심한 거야?” “응!” 철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알았어. 그럼, 내일 병원에 환자 뜸할 때 전화할게.” “고맙다.” 전화를 끊자 또다시 적막이 몰려왔다. 철수는 무의식적으로 원규의 번호를 누르려다 문득, 더 이상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습관은 무서웠다. 평소 잠이 오지 않으면 원규에게 전화해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던 버릇이 한동안 쉬 고쳐지지 않을 것 같았다. 철수는 혼자라는 느낌이 싫어 여느 때처럼 노트북 컴퓨터에 저장된 음악을 틀었다. 경쾌한 리듬과 함께 ‘행복의 나라로’라는 노래가 흐르기 시작했다. ‘장막을 걷어라~ 너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더 느껴보자~ 가벼운 풀밭 위로~ 나를 걷게 해주게~ 봄과 새들의 소리 듣고 싶소~ 울고 웃고 싶소~ 내 마음을 만져줄~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이 노래는 철수와 원규가 고등학교 시절 통기타를 치며 즐겨 부르던 그들의 18번이었다. 철수가 지그시 눈을 감자 원규와 함께했던 추억이 흑백사진처럼 떠올랐다. ‘원규야, 나중에 우리가 어른이 되면 우린 아이들한테 공부해라, 공부해라 잔소리하지 말고 이렇게 넓고 푸른 초원에서 마음껏 뛰어 놀 수 있게 해주자?’ ‘그래! 그리고 철수야, 우린 나중에 도시에 살지 말고 이렇게 물 좋고 공기 좋은 시골에서 같이 살자?’ ‘오브가 콜스고, 두 말 하면 입 아프지!’ ‘하하하!’ 추억에서 눈을 뜨자 여전히 혼자라는 현실만이 철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머릿속엔 현실 속 문제들이 복잡하게 얽혀 그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철수는 복잡한 생각을 지우려 볼륨을 높였고 적막했던 그의 공간은 힘찬 노랫소리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접어드는 초저녁~ 누어 공상에 들어~ 생각에 도취했소~ 새벽의 작은 창가로~ 흘러드는 산뜻한~ 노는 아이들 소리~ 아, 나는 살겠소~ 태양만 비친다면~ 밤과 하늘과 바람 안에서~ 비와 천둥의 소리~ 이겨 춤을 추겠네~ 나는 행복의 나라로 갈 테야~ 4. 근 일주일 만에 학원에 출근한 철수는 먼저, 원장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화초에 물을 주던 원장이 그를 발견하고 말한다. “아니, 이게 누구에요? 김 선생님, 얼굴 잊어 먹겠어요! 참, 친구분 장례식은 잘 치르셨어요?” “예, 덕분에 잘 치렀습니다.” 철수 눈에 비친 50대 후반의 원장은 일주일 사이에 머리숱도 빠지고 배도 조금 더 나온 것 같았다. 오랜만에 인사를 나눈 그들은 잠시 후 고급 가죽 소파에 앉아 원장 비서가 가져다 준 녹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전라도 보성출신 후배가 준건데 어때요? 맛이 괜찮죠?” 원장이 말했다. “네, 향이 아주 좋습니다.” 철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 이제 장례식도 끝났으니 다시 강의 하셔야죠? 그동안 우리 학원 최고의 강사인 김 선생님이 없어서 고생했습니다. 김 선생님 언제 나오냐고 학부모들 원성이 아주 난리가 아니었어요, 하하!” 철수는 말 없이 양복 안 주머니에 있던 편지봉투를 꺼내 원장 앞에 내려놓았다. “아니, 이게 뭡니까?” 원장이 봉투를 집어들며 말했다. “사직서입니다.” “뭐라고요?” 적잖이 놀란 듯 원장은 안경을 올려 쓰며 말을 이었다. “김 선생님, 연봉이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면, 제가 김 선생님한테 실수라도 한 게 있나요?” “아니요, 그런 거 전혀 없습니다.” 철수는 두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런데 왜?” 곧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원장은 철수를 잡기 위해 높은 연봉 등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원장은 철수가 한 달에 한번 인터넷 수학강의만 녹화해주는 조건으로 그의 사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철수는 원장에게 머리 숙여 깍듯하게 인사하고 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참, 김 선생님!” 원장이 말했다. “네?” 철수는 걸음을 멈추며 대답했다. “이건 제가 그냥 궁금해서 그런데 학원 그만 두시고 뭐 하실 건가요?” 그러자 철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행복의 나라로 가려고요!” “행복의 나라요?” 원장의 얼굴에 궁금함이 피어 올랐다. 학원에서 나온 철수는 테헤란로를 따라 역삼동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해가 중천에 떠 있어서 인지 날씨는 그리 춥지 않았고 바람도 불지 않았다. 점심때라 건물 여기저기에서 직장인들이 하나, 둘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철수는 문득, ‘내 정신 좀 봐!’하고는 가던 길을 멈췄다. 그는 점심을 함께하려고 원규가 다니 던 회사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씁쓸한 표정과 함께 왔던 길을 되돌아 가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보니 미국에 있는 부인이었다. 철수는 걸음을 멈춘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자기야, 나 방금 자기 친구 재우씨랑 통화했어. 재우씨가 그러는데 자기 암이라며? 그게 정말이야? 농담이지, 그렇지?” 울먹이듯 다급하게 말하는 부인과 달리 철수는 차분하게 말했다. “사실이야.” “뭐? 사실이라고? 그럼, 우리 이제 어떡해?” 울먹이던 그녀는 결국, 펑펑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내의 우는소리를 듣고 있자니 철수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보다 7살이나 어린 아내는 철은 좀 없지만 착한 여자였다. 하지만 철수는 '행복의 나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라고 생각했다. “그만 울어. 나 오늘 낼 죽는 거 아니야!” 하지만, 수화기 너머에선 철수 아내의 훌쩍이는 소리만 들렸다. 잠시 후 둘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 의논했고, 철수는 그녀에게 아이들을 데리고 귀국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자기가 아픈데 내가 어떻게 미국에 있겠어?” 그녀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말했다. 그러자 철수 마음에 미안하고 고마운 감정이 동시에 스며들었다. 원규 와이프와 달리 주저 없이 귀국을 결심해준 아내가 고마웠고, 자신의 아버지가 아프셨을 때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보지 못했던 지난날 자신의 불효에 대해 미안했다. “고마워!”철수는 진심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긴, 하루빨리 여기 정리하고 갈 테니까 그때까지 약도 잘 먹고, 밥도 잘 먹고 있어야 해, 알았지?” “그래, 그럴게!” 통화를 끝낸 철수는 잠시 핸드폰을 바라보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엔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처럼 알 수 없는 그 어떤 비장한 각오가 담겨 있었다. 5. 택시를 타고 서울 역에 도착한 철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얼마 만에 와 보는 서울역이던가!' 감회가 새로웠다. 그는 현실이란 바쁜 먼지 속에 묻혀 잊고 있었던 '어릴 적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서울 역에 왔던 소중한 기억'을 꺼내 잠시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아빠, 시골에 가면 토끼도 잡고, 꿩도 잡아주세요?’ ‘알았다! 이 아빠가 토끼 잡는 덴 선수 아이가?’ ‘정말이죠? 와, 우리 아빠 최고!' 잠시 후 철수는 열차에 몸을 실었다. 대다수 사람들이 목적지에 빨리 가려고 KTX를 탔지만 그는 일부러 몇 대 안 남은 새마을호를 택했다. 육중한 열차가 기지개를 펴고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창 밖으로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의 순수한 모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KTX를 타면 너무 빨라서 잘 보이지 않던 풍경이 새마을호에서는 잘 보였다. 3시간 정도 달린 기차는 어느덧 대구 역에 도착했다. 역 앞에서 택시를 타고 1시간쯤 달리자 철수의 고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오는 곳이지만 그곳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발전 없는, 말 그대로 완전 촌이었다. “아저씨, 저 앞에 세워주세요.” 철수가 말했다. 택시에서 내린 그는 마을 어귀에서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오후 5시, 해가 일찍 떨어지는 겨울이라 세상은 벌써 검게 물들었고, 낯선 방문객의 냄새를 맡았는지 여기저기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철수가 어느 집 대문을 밀자 '끼 이익!' 거리는 녹슨 철 대문 소리가 그의 방문을 알렸고, 마당 한구석에 묶여 졸던 개는 이내 낯선 철수를 잡아먹을 듯 짖어 대기 시작했다. 철수가 집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미닫이 문으로 된 안방 문이 열리더니 집 주인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형님? 저, 철수에요!” “아니, 이게 누고? 철수 아이가?”사촌 형은 신발도 신지 않은 체 마당으로 내려와 철수의 손을 잡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형님, 그 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래, 잘 지냈다. 근데, 니 어디 아프나? 전보다 얼굴이 마이 말랐다?” 사촌 형은 철수의 얼굴을 좌우로 살피며 말했다. “아프긴요, 괜찮아요!" 잠시 후, 그들은 저녁 밥상을 마주하고 앉아 술 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뭐라꼬? 철수 니가 이 촌에 와서 살겠다꼬?” “네!” “야야, 그거 말처럼 그리 쉬운 일 아이다!” “아니, 도련님은 미국 유학까지 갔다 오신 분이 뭐가 아쉬워서 이런 촌에서 살려고 그런데요?” 옆에 있던 형수도 한마디 거들었다. 철수는 술 잔을 들이키고는 기차를 타고 오며 느꼈던 생각을 털어놓았다. “형님, KTX를 탔을 땐 잘 보이지 않던 바깥 풍경이 새마을호에서는 잘 보이더라고요!”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고?” “세상 사람들이 성공이란 미명 하에 다들 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리기 때문에 우리가 정작 보고 느껴야 할 삶의 중요한 것들을 못보고 사는 것 같아요.” 사촌형과 형수는 귀를 쫑긋 세운 채 철수의 말을 경청했다. “제가 KTX대신 새마을호를 탔어도 이렇게 형님을 만났잖아요! 그리고 비록, 한두 시간 늦게 왔지만 대신 KTX에선 볼 수 없었던 아름다운 자연도 보고, 삶을 돌아볼 수 있는 진 시간도 가질 수 있었고요.” 철수는 갈증을 느꼈는지 물을 마시고 말을 이었다. “저 또한 남보다 빨리 출세하는 게 행복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살아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남보다 조금 늦게 가고, 남보다 조금 부족하더라도 우리 삶에는 성공이나 물질보다 더 가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걸 알았어요!” “가치 있는 거? 그게 뭔데?” 사촌 형이 물었다. “이렇게 형님하고 술 마시며 옛 추억도 더듬고 앞날에 대해 의논하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죠!” “그게 가치가? 그럼, 우리 가치 있는 일 마이 하자. 자, 마시자!” “네!” “이 양반은 또 생선이 물을 만났다!”형수가 웃으며 한 마디 거들었다. 오랜 만에 만난 그들은 동네 개들이 짓다 지쳐 잠든 새벽 녘까지 술잔을 부딪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아침, 철수는 사촌 형과 함께 부모님이 영면해 있는 묘지를 찾아 인사 드리고 마을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촌 형 말에 의하면 농촌의 가장 큰 문제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젊은 사람들은 직장이니 애들 교육이니 해서 하나, 둘 도시로 떠나고 촌에는 나이 든 사람들만 남아 노동력이 현저히 부족하다고 했다. “야야, 오십 대인 내가 우리 마을서 막내 소리 듣는다! 이게 말이 되나?” 그는 또 노동력이 부족하다 보니 특산물 재배 같은 소득창출을 위한 기회가 생겨도 그 기회를 잡을 수 없다고 했다. 사료나 비료 값은 매년 오르는데 수확물량은 갈수록 줄어들고, 게다가 FTA때문에 외국 농산물은 물 밀 듯이 밀려오는데 자국농민을 보호해야 할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현실과 동 떨어진 마치, 농민들은 냉장고 이야기하는데 그들은 늘 보일러 이야기만 하고 있으니 농촌이 잘 될 턱이 없다고 했다. 철수 손에는 수첩과 볼펜이 들려 있었고, 그는 사촌형이 농촌의 현실과 문제점에 대해 말하는 걸 꼼꼼히 기록했다. “야, 철수야! 니 그거 다 적어서 모할라고 그라는데?” “적을 알아야 싸울 준비를 하죠?” “싸울 준비? 니 어디 싸우러 가나?” “하하! 그게 아니고요, 농촌에 정착하려면 우선, 농촌의 문제를 알아야 거기에 맞는 적당한 대책을 세울 수 있다는 뜻이에요!” “그래? 난 또 니가 누구랑 싸우러 간다는 소리로 들었다.” “형님, 보청기라도 하나 맞춰드릴까요?” “아이다. 이래뵈도 내가 이 마을 막내 아이가? 막내가 무슨 보청기……” 철수는 사촌형과 걸어가며 주위를 열심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아이들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철수가 어렸을 때 이곳에 오면 수 많은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산으로 들로 뛰어 다니며 쏟아낸 웃음 소리가 마을 전체를 뒤덮었는데 그 많던 아이들이 다 어디로 갔는지 어쩌다 우리 농촌이 이렇게 됐는지 가슴 속 답답한 감정이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일주일간 사촌형 집에 머물며 농촌답사를 끝낸 철수는 아침 상을 물리자 마자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집 앞에는 미리 불러놓은 택시가 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이제 가면 또 언제 오는데?”사촌 형이 말했다. “오늘 애들 엄마가 귀국하니까 상의해보고 가급적 빨리 와야죠. 그래야 봄 되기 전에 형님 따라 내년 농사 준비하죠.” “근데, 니 진짜 오는 거 맞나?” "아니, 당신은 가짜로 오는 사람이 집을 삽니까?”형수가 말했다. “맞다, 니 벌써 집도 샀지! 아, 동네 막내가 이래 정신이 왔다 갔다 하면 안 되는데? 나는 막낸데!” “하하! 자, 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내려올 때 전화드릴께요!” “그래, 조심해 가라!” “네!” 이윽고 철수를 태운 택시가 힘찬 엔진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창 옆으로 펼쳐진 마을 풍경을 바라보던 철수가 문득, 고개 돌려 뒤 돌아보니 사촌 형과 형수는 아직도 택시 쪽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철수의 마음이 따듯해졌다. '그래, 서로 아껴주고 배려하며 인간의 따듯한 정을 느끼며 사는 거, 이게 바로, 사람답게 사는 거야!’ 6. '상쾌한 아침'의 녹화는 단 한번의 NG도 없이 부드럽게 진행되고 있었다. 철수는 난생 처음 해보는 방송출연임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게 잘 적응했다. “그럼, 친한 친구분의 갑작스런 죽음이 귀농을 결심하게 된 이유였나요?”남자 사회자가 물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돌아가신 아버님과의 약속 그리고 제 아이들의 미래와 농촌지역의 발전을 위해서였습니다.” “아버님과의 약속이라니요?” “제 아버님은 농촌에서 태어난 농부의 아들이었습니다. 우리 아버님 세대가 대부분 그렇듯이 저희 아버님도 많이 배우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못 배우셨기 때문에 농촌발전에 도움이 못 된다는 생각에 저를 가르치기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이어진 철수 말에 의하면 그의 아버지는 철수에게 지식을 얻기 위한 교육의 목적은 다양하지만 참교육의 목적은 바로, 남을 배려하며 함께 더불어 살기 위한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해 주셨다고 한다. 그리고 대학을 졸업하면 반드시 고향에 내려와 농사를 안 지어도 좋으니 고향과 지역발전을 위해 함께 더불어 사는 삶을 살라고 당부하셨다고 한다. “그런데 제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철수는 미안하다는 듯 말했다. “아버님이 참 훌륭한 분이셨군요!”남자 사회자가 말하자 여자 사회자는 “그러게 말이에요. 요즘 공부의 목적은 상급학교 진학이나 출세를 위한 도구로 전락했는데 말이에요.”라고 거들었다. “어렸을 땐 몰랐는데 제가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예전 아버님의 말씀이 늦었지만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더군요.” “아무리 동기부여가 확실하다고 해도 서울에 살다가 하루 아침에 농촌에 적응한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초창기 농촌 생활은 어떠셨나요?”남자 사회자가 말했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제가 미국에서 유학생활을 한 5년 했었는데요, 말도 틀리고 문화도 다른 남의 나라에서도 살았는데 하물며, 같은 문화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내 나라 내 땅에서 못살게 뭐 있겠나 라는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사모님과 자녀분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암에 걸려 공기 좋은 곳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니까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참, 건강은 어떠세요?”여자 사회자가 물었다. “아주 좋습니다!” “그럼, 완쾌되신 건가요?” “오늘 처음 밝히는 건데 저는 암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네?” 여자 사회자의 눈이 커졌다. “암은 핑계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농촌으로 이주하자고 하면 집 사람이나 아이들의 반대가 심하고 그러다 보면 본의 아니게 가족간에 사이가 나빠질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하얀 거짓말을 했습니다.” “너무 하셨어요! 그 동안 사모님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겠어요?”여자 사회자가 말했다. “그 점은 저도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집 사람이나 애들이나 다들 농촌생활에 만족하고 너무 좋아합니다. 그나저나, 이 방송 나가면 저희 집 사람이 절 가만히 안 둘 텐데 큰일입니다. 하하!” “사모님도 마음 고생이 심하셨겠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가족의 생계와 앞 날을 책임져야 하는 김철수씨도 비록, 말씀은 안 하시지만 마음고생이 심하셨을 거에요. 그건 제가 남자라서 조금은 압니다.”남자 사회자가 말했다. 철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남자 사회자가 고맙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자, 많은 사람들이 한번쯤은 복잡한 도시를 떠나 공기 좋은 귀농생활을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농촌에서의 제한된 경제활동 그리고 도시에 비해 선택의 폭이 적은 아이들의 교육시설 등을 이유로 포기하는 게 현실입니다. 김철수씨는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극복했나요?” “그건 말입니다……” 철수가 입을 열자 사회자와 방청객들은 그의 입에서 또 다시 어떤 이야기가 쏟아질지 자못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7. 첫 술에 배부른 일 없듯 귀농 첫해 가을에 받아 든 철수의 농사성적표는 낙제 수준이었다. 사촌형을 따라 나름 열심히 노력했지만 평생을 도시에서 살았던 철수에게 낙제점수는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의 부인과 아이들이 갈수록 농촌생활에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맨 처음 시골에 내려와 도시와 다른 생활환경 때문에 불편해 하던 그들은 세월이 한 장, 두 장 쌓여갈수록 농촌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철수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자신이 꿈꾸던 '행복의 나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것 같아 기뻤고 아울러,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며 더 열심히 살겠노라 다짐했다. 저녁식사를 끝낸 철수네 가족은 여느 때처럼 마을 인근의 들로 산책을 나왔다. 중학교 3학년인 장남 재원이와 초등학교 6학년인 차남 재성이는 강아지를 데리고 벌써 저 만치 앞으로 달려가 반딧불을 찾는다며 들녘을 누비고 있었다. “우리 재성이가 살이 많이 빠졌네?”아내의 손을 잡고 걷던 철수가 말했다. “시골로 이사 오고 나서 아토피도 없어지고, 체중도 10키로나 빠졌어요!”아내는 기쁜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런데 당신은 아직도 서울에서 살고 싶어?”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문득, 서울이 그립다가도 저렇게 애들이 살도 빠지고 아토피도 없어져서 밝고 건강하게 자라는 걸 보면 이곳이 좋기도 해요.” “더 살아봐. 그럼, 농촌이 더 좋아질 테니까!”철수는 자신 있게 말했다. “참, 내년에 재원이가 고등학생이 되는데 적당한 학원이 없어서 걱정이에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수능 준비를 해야 할 텐데……” “인터넷이 있잖아!” “인터넷이요?” “그래, 인터넷! 우리 때야 인터넷이 없어서 부모들이 시골서 아이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 유학 보내고 그랬지만 지금이야 인터넷으로 음악, 영어, 논술 같은 사교육도 받을 수 있고, 게다가 티비에서 하는 교육방송도 얼마나 좋은데! 걱정 마 우리 애들은 잘 할 테니까!” “정말 그럴까요? 남들처럼 학원에 안 보내도 될까요?” “당신, 부모의 참된 역할이 뭔지 알아?” “뭔데요?” “부모의 참된 역할은 바로, 아이들한테 공부 외에 다양한 경험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야. 아이들이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의 적성이나 특기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그래서 결국엔 본인이 잘하는 것 또는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 수 있도록 믿고 기다려 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야!” “정말 그럴까요?”아내는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날 봐! 우리 아버님이 나한테 도시와 농촌생활 모두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셨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농촌을 선택한 것처럼 우리도 아이들한테 다양한 경험을 체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주고 무엇을 할지 최종선택은 아이들 몫으로 남겨두자고.” “당신 이야기를 들으면 당신 말이 맞는 것 같다가도 서울에 사는 친구들 말 들으면 괜히 우리 아이들만 경쟁에서 뒤 쳐지는 것 같고……” “어렵지?” 아내는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서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바로, 자식농사라고 하는 거야.” “그나저나, 당신 몸은 좀 어때요?” “괘, 괜찮아!”철수는 순간, 뜨끔했다. “내일 서울에 학원강의 녹화하러 가면 재우씨한테 들러 검사도 받고 와요!” “그, 그래. 그럴게……” 8. 한 달에 한 번 서울에 가서 학원강의를 녹화하는 철수는 시골로 내려가기 전 가끔 친구 재우를 만나 식사를 함께했다. “철수야, 앞으론 좀 자주 보자!”식당 문을 나서며 재우가 말했다. “자주 보고 싶으면 너도 빨리 시골로 내려와!” “나야 그러고 싶은데 우리 마누라 님 때문에……” 그 때였다. 저 앞 길에서 한 남자가 손에 잡지를 들고 판매하는 모습이 보였다. “재우야, 저게 뭐야?”철수가 호기심 가득 찬 표정으로 말했다. “아, 저거! '빅이슈(Big Issue)'라는 잡지인데 저걸 팔면 일정 수익이 노숙자한테 돌아가서 그들이 재활하는데 도움이 된데. 영국에서 처음 시작됐는데 우리나라는 작년 여름 터 시작했다지 아마…….” “아, 맞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순간, 철수의 눈이 빛났다! “그 생각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재우야, 나 먼저 간다. 나중에 보자.” 말이 끝나자마자 철수는 지하철 역 쪽으로 냅다 뛰어가기 시작했다. 재우와 헤어진 철수는 한시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평소와 달리 KTX에 몸을 실었다. 평소 즐겨 타던 새마을호와 달리 KTX는 바깥 풍경이 잘 안 보일 정도로 빨랐지만 무슨 연유인지 그는 평소보다 더 늦게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답답한 마음에 철수는 핸드폰을 꺼내 사촌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형님, 동네 어른 들하고 인근 마을 이장 님들 좀 모아주세요!” 재우와 헤어지고 사촌형과 만나기로 한 마을회관까지 단 2시간 반 만에 도착했지만 철수에게 그 시간은 몇 날 몇 일처럼 길게 느껴졌다. 택시에서 내려 마을회관 안으로 뛰어 들어가자 철수네 마을 어른과 인근 마을 이장 님들까지 대략 열 두 어명이 모여있었다. 얼마나 급히 왔는지 쌀쌀한 가을 밤 날씨였지만 철수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뭐 땜시 이렇게 모이라고 한 겨?” 철수를 발견하고 충청도가 고향인 인근 영촌리 이장님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철수는 사람들 앞으로 나가 숨을 고르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들 바쁘실 텐데 이렇게 모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모이시라고 한 건 다름이 아니고요……” 철수는 먼저 사람들 앞에서 지난 1년간 농사를 지으며 경험했던 가장 큰 문제점에 대해 설명했다. 가뜩이나 부족한 인력으로 어렵게 농사를 지어도 중간상인들의 농간 때문에 애써 키운 농산물이 제 값을 받지 못하고, 그런 일이 반복될수록 농가부채는 갈수록 커지는 악순환을 면치 못하는 게 농촌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지적했다. “그게 뭐 한 두 해 일인가?”금정 면 이장님이 푸념하듯 말했다. “그래서 제가 좋은 생각을 하나 제안할까 합니다!”라고 철수가 말하자 사람들은 일제히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제가 미국에서 공부할 때 '클린 카트(Clean cart)' 라는 게 있었습니다.” “뭐? 크, 클린트? 그거 미국 대통령 아녀? 비서랑 바람 피다 걸려서 아주 동네방네 개망신 당한 코 무쟈니 큰 사람, 맞지?”영촌리 이장 님이 말했다. “하하! 그건 클린턴이고요. 제가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클린 카트입니다.” 철수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클린 카트는 미국 도심지에서 영세한 상인들이 시의 허락을 받고 검증된 식품이나 과일 등을 관련규정하에 판매하는 일종의 노점상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농촌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도시인에게 직판할 것을 제안했다. “그럴 수만 있으면 정말 좋지! 그런데 그게 어디 말처럼 그리 쉽나?”이번에는 철수의 사촌 형이 말했다. “물론,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도 아닙니다!”철수가 말했다. 그는 계속해서 오늘 서울에서 봤던 '빅이슈' 잡지를 예로 들며 재활의지가 있는 노숙자의 노동력과 갈수록 먹거리에 대한 불신이 커지는 도심지에 유기농 기법으로만 생산된 과일 등을 클린 카드에 접목하여 직판하면 분명, 승산이 있을 거라고 설명했다. “철수야, 그게 정말 가능한 기가?”사촌 형이 물었다. “네, 쉽지는 않겠지만 가능합니다!”철수는 자신 있게 말했다. 그날 저녁, 마을회관에 모인 사람들은 마을 단위로 자신들이 일년 간 유기농 기법으로 생산할 수 있는 과일이나 쌀 등의 물량을 적어 철수에게 제출했다. “철수야, 니 진짜로 자신 있나?”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촌 형이 물었다. “네, 자신 있습니다!” “내는 평생 농사만 져서 다른 건 잘 모른다. 어째 거나, 니 덕에 우리 농촌이 좀 잘 살수 있었으면 좋겠다.” “힘내세요, 형님! 꼭 그렇게 될 테니까요!” 9. 농한기에 접어들자 농촌은 한가로워졌다. 하지만 철수는 오히려 더 바쁜 날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는 유기농 기법으로 재배한 농산물을 도심에 직판하는 제도를 클린 카트라는 영어이름 대신 '희망 수레' 라는 순수한 우리 말로 변경했다. 희망 수레 안에는 노숙자의 '재활희망', 농민의 '경제희망' 그리고 도시 사람들의 먹거리에 대한 '안전희망' 모두가 담겨 있다는 뜻이었다. 철수는 제일 먼저 도청에 찾아가 유기농 농산물에 대해 정부가 인증을 해줄 수 있는지 문의했고, 관련규칙에 따라 관리감독을 받으면 가능하다는 대답을 얻었다. 도청에서 집으로 돌아온 철수는 오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식사하셔야죠?” 부인이 물었다. “나 바쁘니까 편하게 먹을 수 있도록 당신이 밥 좀 비벼다 줘." “알았어요.” “고마워!” 철수는 컴퓨터를 키자마자 공문을 만들기 시작했다. 공문에는 재활의지가 있는 노숙자들에게 농촌에서 농사를 짓거나 아니면, 도시에서 희망 수레를 맡아 유기농 과일이나 농산물을 판매할 사원을 모집하려고 하니 협조를 요청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공문작성을 끝낸 철수는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 시청과 노숙자들이 많이 모여있는 쉼터 같은 각종 비영리 단체에도 이메일로 공문을 보냈다. 공문 발송을 끝낸 철수는 아들 재원이를 불렀다. “부르셨어요, 아빠!” 재원이가 안방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재원아, 너 홈페이지 만들 줄 알지?” “네. 홈페이지 필요하세요?” “아빠가 필요한 게 아니라 우리 농촌과 여러 사람들의 희망을 위해서 필요해” “희망이요?”재원이는 무슨 말인지 궁금했다. 철수는 곧 아들에게 '희망 수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그는 우리사회가 특정지역만 또는 특정인만 잘 사는 불균형한 사회가 되면 안 된다며 '희망 수레'의 뜻과 목표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아들, 멋지게 홈페이지 만들어 줘야 해?” “네, 아빠! 그렇게 좋은 일이라니 저도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 볼게요!” “그래, 고맙다. 우리 아들 최고다!”철수는 재원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1년 새 부쩍 커버린 키만큼이나 재원이의 생각도 성장한 것 같아 철수는 무척 흐뭇했다. 얼마 후 철수는 사람들과 협의 끝에 '희망 수레'에 대한 상표권 등록과 일종의 협동조합 같은 주식회사 설립도 추진했다. 아울러, 농산물 수확량과 각 마을에서 동원 가능한 노동력에 따른 차후 수익배분 등의 약관도 마련했다. 희망 수레에 참가의사를 밝힌 마을 대다수 주민들은 40대 이후의 고령이었지만 그들 얼굴에는 옛 농촌의 활기찬 모습이 부활되기를 기대하는 희망의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철수가 마을회관에서 회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 부인이 힘없이 그를 맞았다. “이제 오세요.” “아니, 당신 얼굴 표정이랑 목소리가 왜 그래? 어디 아파?”철수가 말했다. “아픈 게 아니고요……”그녀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그럼, 왜 그러는데?” “오늘 당신이 공문을 보냈던 시청 몇 군데에서 연락이 왔었어요.” “정말? 뭐래? 도와주겠데?”철수는 어린 아이처럼 들 뜬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희망 수레'의 취지는 좋으나 기존 노점상과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현 법제도 하에서는 도와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쉼터 같은 비영리 단체에서는 너무 좋은 아이디어라며 벌써부터 참가의사를 밝힌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그렇군……”아내의 설명을 들은 철수의 어깨가 힘없이 주저 앉았다. “이제 어떡해요? 사람들 실망이 클 텐데……”아내가 말했다. 생각했던 일이 틀어지자 철수의 희망이 절망의 그림자로 바뀌었다. 철수는 답답한 마음을 정리하려 마당으로 나왔다. 쌀쌀해진 바람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자 별이 가득한 밤 하늘에 농촌의 부활을 꿈꾸는 마을 사람들의 희망찬 얼굴이 하나 둘 떠오르기 시작했다. '후~~' 철수는 긴 한숨을 내 쉬었다. 10. “아니,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여자 아나운서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말했다. “기대했던 시청에서 도와주지 못하겠다는 연락을 받고 절망하던 차에 제 아내가 갑자기 아파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아파트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먹거리에 대한 안전은 주부들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니 차라리 아파트 단지의 부녀회를 통해 희망 수레를 시작해 보자는 거에요.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만 결국, 아내의 아이디어가 주효했습니다!” 철수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쉼터를 비롯한 비영리 단체에서 노동력을 확보한 그들은 과일을 주력상품으로 한 안전한 유기농 농산물 재배에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철수와 아내는 홈페이지를 통해 서울 및 대도시 인근 아파트 부녀회에 희망 수레에 대한 취지와 유기농 농산물에 대한 홍보를 시작했다고 한다. 정부관계자가 매월 농촌에 나와 유기농 재배를 관리하는 모습을 캠코더에 담아 정기적으로 홈페이지에 올려 도시 사람들이 이를 확인할 수 있게 했고 아울러, 도시 사람들이 언제든 농촌을 방문해서 자신들이 먹게 될 농산물에 대해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했다고 한다. 가격은 비록, 일반 농산물에 비해 비쌌지만 각종 외국산 불안전 먹거리가 판치는 세상에 믿고 먹을 수 있는 신토불이 유기농 농산물은 주부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 첫 해 50개 밖에 되지 않던 '희망 수레'는 현재 전국에 100개가 넘고 이와 관련된 일자리도 5백 개 이상 창출되었다고 했다. 철수의 설명이 끝나자 남자 아나운서가 아무 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자 아나운서도 그리고 객석의 방청객들도 따라 일어나 박수를 쳤다. 철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회자에게 그리고 방청객들에게 차례로 머리 숙여 인사했다. 스튜디오 조명에 비친 그의 눈에는 그간 흘린 고생과 노력 때문인지 눈물이 살짝 맺혀있었다. “그 동안 저희 '상쾌한 아침' 시간에 여러 초대손님들을 모셔봤지만 저는 오늘처럼 가슴 뿌듯하고 감동적이었던 시간은 없었습니다!” 남자 사회자가 말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김철수씨 이야기를 더 듣고 싶은데 아쉽게도 벌써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라고 여자 아나운서가 말하자 방청석에서도 ‘아~’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자, 김철수씨. 끝으로 시청자 여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시죠!” 남자 사회자가 말하자 철수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 농촌과 도시 모두 균형 있게 발전하며 공존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무리 문명이 발전하고 국민소득이 높아져도 건강한 농촌과 자연이 없으면 우리 인간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꼭 깨달았으면 합니다. 아직도 우리 농촌이 부흥하려면 멀었습니다. 하지만, 전 꼭 그렇게 되리라는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은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에 우리가 함께 노력과 관심이란 물을 주면 그 희망은 반드시 아름다운 현실로 피어날 것이라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철수의 말이 끝나자 '상쾌한 아침'의 끝을 알리는 시그널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고, 사회자와 방청객들은 다시 한번 더 철수를 향해 진심이 듬뿍 담긴 박수를 보냈다. -끝- ▶수상소감 신세계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한 미국 이민생활. 하지만, 그 동경은 어느새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변해 있었다. 낯선 타향살이는 분명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위기로 다가온다. 나 또한 그랬다. 매일 반복되는 따분한 일상과 다른 나라에서 느끼는 이질감.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고 그래서 시작한 것이 글쓰기였다. 하루의 일상을 정리하는 일기로 시작한 나의 글쓰기 작업은 벌써 3년째가 지났다. 그러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소설'을 써 보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따분한 저녁 시간을 빈둥거리는 것보다 나의 지난날과 앞으로의 미래를 계획하자는 목적으로 시작한 일기는 어느새 무료한 이민생활에 유익한 벗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응모한 미주중앙일보 신인문학상. "수상했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의 느낌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큰 기쁨이자 감동이었다. 부족한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에게 감사하고 이런 좋은 기회를 지속적으로 제공해 주시는 미주중앙일보사에도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자만하지 않고 더 열심히 쓰고 노력해 훗날 '미주중앙신인문학상'을 빛낼 수 있는 기성작가가 되고 싶다.

2014-05-20

[단편소설 부문/가작] 눈물점

오늘 낮에 퇴근하고 집에 와달라는 민정이 전화를 받았다. 남편이 타주로 출장을 갔으며 집이 무서워 혼자 잘 수가 없다고 했다. 지난번에 그녀의 집을 한번 가본 적이 있었다. 집이 상당히 컸고 정원도 넓었다. 여자 혼자 자기에는 좀 무섭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나는 친척도 아니고 남자인데 왜 나한테 이런 부탁을 하는지 의아심도 들었지만 싫지는 않았다. 평소에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는 사이이고 나이 차이도 많이 나기 때문에 믿고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흔쾌히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고 맛있는 것들도 많았다. “이 굴 좀 들어봐 선배. 싱싱하고 맛있어.” 굴은 정력에도 좋은 식품이라고 알고 있었지만 나는 바다 비린내가 싫고 특히 허물거리는 모양이 징그러워 평소에 먹지 않는 음식이다. 그녀가 입에 넣어 주기에 어쩔 수 없이 먹어주었다. “마시다 남은 소주 같은 것 없니?” 비린내가 났었고 아무래도 술이 한잔 들어가야 개운하고 분위기도 좋아질 것 같았다. 그녀는 냉장고에서 복분자 술을 꺼내왔다. “이 술은 달콤하고 몸에도 좋대.” 이것도 요강을 깬다는 정력에 좋은 술이다. 오늘은 쓸데없이 좋은 것을 먹는 날이다. 집에 갈 수도 없는 상황이라 아내를 안을 수도 없다. 아무튼, 술도 같이 나누어 마시며 오랜만에 즐거운 식사를 마쳤다. 거실은 넓고 아늑했으며 커다란 창문 너머로는 푸른 잔디와 크고 작은 정원수들이 밤 조명에 비쳐 한 폭의 풍경화도 같았다. 오늘 이 자리가 그렇게 편한 것은 아니었다. 여자와 둘이서만 밤을 보내려니 기분이 좀 묘해졌다. 민정이는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날씬해서 여자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게다가 오늘은 얇고 가슴이 훤하게 드러난 원피스를 입고 있어 눈길이 자주 갔었고 설거지하는 뒷모습이 불빛에 반사되어 몸매도 그대로 보여 지고 있었다. 야릇한 충동을 느껴 잠시 당황했지만 그저 하룻밤 후배 집을 돌봐주는 단순한 일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소파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잘 시간이 되어왔다. 집이 컸기 때문에 손님용 방도 따로 있었다. “선배, 이 방에서 자. 그 안에 목욕탕도 있어 샤워도 하고” 민정이는 나와 둘이 있을 때는 아예 말을 놓는다. “그래, 문단속 잘했지? 거실에 불은 켜두는 것이 좋아.” 내가 마치 이 집 주인이라도 되는 듯 말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샤워를 하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사실대로 말하고 싶었지만 공연한 오해를 할까봐 사무실에서 야근을 한다고 했으며 종종 있어왔던 일이라 믿어주었다. 나는 낯선 잠자리에 적응을 못 해 침대에서 뒤척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열리고 민정이가 베개를 들고 들어왔다. 깜짝 놀라서 일어났다. “여기서 잘래.” 그녀는 나의 동의도 없이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마치 어린 딸이 밤에 깨어나 아빠의 품속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런 황당한 일이 생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우리는 20년 넘게 차이가 나는 대학교 선후배 관계이고 나이로 따지면 딸과 아빠와 같은 사이이다. “민정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그녀는 대답도 없이 내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는 아직 젊은 나이 이지만 나는 몇 해 있으면 환갑을 맞는 나이다. 아무리 친하게 지내는 선후배 사이지만 이런 일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있었어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녀의 손이 내 가슴으로 들어왔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밀어내어야 한다는 생각과는 달리 내 몸이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부딪치는 그녀의 젊고 부드러운 몸이 나의 판단을 가로막고 있었다. 평소에 주장하던 도덕, 윤리 따위의 생각들을 완전히 막아 버렸다. 마치 맹인이 사랑을 나누듯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촉감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입술이 닿아졌고 두 몸 사이에는 한 치의 공간도 허락되지 않았다.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느낌으로 그녀를 받아들였고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LA한인타운에서 광고디자인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으며 미대동문회 총무 직을 맡고 있다. 친한 친구나 친척들이 별로 없는 이곳 생활에서는 학교 동문회 모임으로 서로 외로움을 달래며 친하게 지내고 있다. 젊었을 때는 자식들 키우느라 바빠서 동문회 나갈 생각을 안 했지만 아이들이 커서 대학을 가버린 뒤에는 동문회 일로 작은 즐거움을 찾고 있었다. 동문회 주소가 내 사무실로 되어 있었기에 동문의 전화가 자주 걸려온다. “미대 동문회죠?” 젊은 여자 목소리였다. 동문회는 오십이 넘은 내 나이도 어린 편에 속한다. 대부분 환갑을 넘은 선배들이라 마치 노인회 모임 같아서 조금씩 싫증이 나고 있었다. “저는 98학번, 미술전공이고 3년 전에 미국에 왔어요.” 딱 부러지고 활기찬 목소리였다. 입학연도를 봐서는 나이가 30대 중반 정도인 것 같았다. “반가워 후배, 사무실에 한번 들려. 다음달에 동문전시회도 있으니까 참가하면 좋겠네.” 나보다 한참이나 후배였기에 말을 놓았다. “선배님은 몇 학번이세요?” 따지는 말투였지만 애교가 섞인 목소리였다. “죄송합니다. 후배님, 너무 반가워서 그만 하하” 그녀의 이름은 민정이었고 주소와 전화번호를 남기고 끊었다. 동문회는 두 번의 공식적인 행사가 있다. 여름에는 전시회를 열고 년 말에는 송년파티를 갖는다. 물론 개인전을 하거나 경조사가 있을 때는 수시로 모임을 가지고는 있다. 오늘은 전시회 준비로 모임이 있는 날이다. 나는 민정이를 불러내었다. 그녀가 들어왔을 때 칙칙했던 사무실이 갑자기 밝아져 왔다. 첫눈에 민정이는 무척 예뻤으며 몸매도 날씬했다. 동문은 일시에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이전부터 알았던 것처럼 인사를 시키고 내 옆자리에 앉혔다. 여자 동문들이 젊은 후배인 그녀를 보고 부러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야, 우리도 저렇게 예쁠 때가 있었어.” 아무리 포토샵에서 주름을 없애고 손을 보아도 그림이 안 되는 여자 선배가 말을 했다. “글쎄, 호박에 줄긋는다고 다 수박이 되남.” “둘 다 오래되면 먹을 수도 없는데 뭘 따져 따지기는.” “나는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잘 먹는데.” 남자 선배들의 짓궂은 농담들이 오갔다. 오랜만에 젊은 후배가 옆에 앉아있으니 나도 젊어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전시회를 하려면 준비할 것이 많았다. 카탈로그 제작은 내가 맡았고 다른 일들은 서로 분담을 했다. 회의를 마치고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을 때도 민정이는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아무래도 내가 친근하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처음 만나는 자리이고 나이 많은 선배 앞에서 할 얘기도 없을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 작품 꼭 내도록 하고, 작품제작은 내 사무실에 와서 해. 언제든지 환영해.” “그래도 돼? 선배.” 그녀가 말을 놓고 있었다. 그런데 싫지가 않았고 오히려 친근감이 들었다. 예쁜 여자는 무슨 짓을 하여도 용서가 잘된다. 만약에 못생긴 여자 후배였으면 내 성격에 분명히 꿀밤이 날아갔을 것이다. 민정이는 직장을 갖고 있지 않았고 아이도 없었다. 그날 이후로 사무실에 나와 작품을 하면서 동문회 일도 도와주었고 자연스럽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아예 말을 놓은 상태이다. “민정인 아버님한테 말을 놓는구나.” “말을 놓아서 이상해 선배? 나는 아빠 같아 좋은데 호호.” 나는 아버지한테는 꼭 존댓말을 했었고 내 자식들은 한국말로 물어도 영어로 대답하니 이곳에서는 존댓말의 의미는 없다. “아버님은 한국에 계시니?” “응, 아빠가 이혼하고 딴 여자와 살고 있어.” 민정이는 굳이 말을 안 해도 되는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녀가 고등학교 때 부모님이 이혼을 했으며 아버지가 큰 사업을 하고 계셨기에 어머니는 충분한 위자료를 받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미남이셨기에 항상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도 했다. 이혼하고난 후에도 민정이는 아버지 집을 들락거리며 아버지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아버지의 젊은 여자가 아이를 낳은 후에는 민망스럽고 아버지가 미워져 발길이 뜸해졌었고 민정이 결혼식 날, 손을 잡고 들어가 준 것이 마지막 만남이라고 했다. “민정이는 아빠를 닮아서 예쁘구나. 아빠가 보고 싶지 않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여기 아빠가 있잖아. 호호.” 나를 아빠로 생각해주니 고맙기도 했지만 남자로는 보아 주지 않는 것 같아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그녀는 그동안 이야기할 상대가 없어 심심했었는데 내가 있어서 좋다고 했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갈 때면 가끔 포옹을 해주었는데 딸의 느낌이 보다도 여자의 느낌을 받고 있었다. 전시회는 성황리에 끝이 났다. 민정이는 자기 집으로 동문을 초대해서 바비큐 파티를 열었다. 집도 훌륭했고 정원도 넓었다. 정원에서 고기도 굽고 술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많은 음식을 차렸고 일하는 도우미 아줌마까지 있었다. 나는 술 한 잔을 들고 정원의 작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민정이는 예쁜 외모에다 돈 잘 버는 남편도 있고 아이만 있으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도 전부 다는 주시지 않는 모양이다. 나에게는 돈을 주시지 않는 것처럼. “선배, 왜 여기 혼자 있어?” 민정이가 옆에 와 앉으며 말했다. 초록색의 잔디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남편은 토요일인데도 일하러 갔나 봐?” “아니 골프 치러 나갔어.” 우리처럼 그림 그리는 사람들은 밖에 나가 운동을 하는 것보다 집안에서 꼼지락거리는 것을 더 좋아한다. “그런데, 민정인 왜 아기가 없어. 결혼 한지 4년이 지났다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공연한 것을 물어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민정이가 나에게 되물었다. “선배는 애들이 어떻게 돼?” “원 스트라이크 원볼, 둘 다 대학생이야 지금.” “어머, 학비가 엄청나게 든다던데. 그 작은 사무실에서 학비가 나와?” “공부를 잘해서 장학금을 받고 있어.” “어머나, 선배를 닮아 머리가 좋은 가봐. 축하해.” 그녀는 나의 팔을 툭 치며 부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나는 돈도 못 벌고 다른 재주도 없어 자랑할 거라고는 공부 잘하는 두 자식밖에 없다. 동문전시회가 끝났으니 이제 연말파티 이외에는 공식적인 일은 없었다. 어느 날, 민정이가 식당을 예약해놓고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웬일이야,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방이 단독으로 되어있는 고급 식당이었다. “오늘 우리 딸 생일이야.”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분명 아이가 없다고 했었는데. “하늘나라에 있어.” 민정이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말을 이어나갔다. “2년 전에 기다리던 아기를 낳았는데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다운 증후군’이라는 희귀한 질병을 갖고 태어났어. 현대 의학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이라 했고 아기는 집에도 와보지 못한 채 하늘나라로 가버렸어.” 너무도 가슴이 아파 따라 죽을 생각도 여러 번 했었다고 했다. 만약 지금 그 아기가 있었으면 동문회에 나오지도 않았을 거라고 했다. 당연한 말이다.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즐거웠고 보람되었던 일은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었다. 지금은 컸다고 아빠 말을 잘 안 듣지만, 어릴 때 아빠를 기다리고 찾으며 품에 안기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남들은 주렁주렁 쉽게도 낳아 기르는데 왜 민정이한테 그런 일이 생겼는지 하느님이 야속했다. 아기의 질병에는 부모의 유전적인 것이 원인이 있다고 했다. 의사는 확률적으로 몇 천분의 일이기 때문에 다음번의 아기는 괜찮을 거라고 했지만 아직은 두려워 아기를 갖지 못한다고 했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남편하고 같이 해야지.” “남편도 오늘을 기억하고 있어. 그렇지만, 서로 말을 꺼내지 못해.” 남편의 가족 중에 비슷한 사례가 있어 자기 탓으로 여기고 있는데 아기 이야기는 꺼낼 수가 없다고 했다. 유전자의 좋고 나쁜 것을 미리 가려낼 수도 없는 일이고 본인의 잘못도 아니기 때문에 남편이 무척 안쓰럽다고 했다. “의사 말대로 아기를 가져. 민정이 닮은 예쁘고 건강한 아기가 나올 거야.” “그러기를 바라고는 있는데 아직은 무서워.” “내가 도와줄게. 민정아 힘내.” “도와줘 제발. 호호.” 내가 말실수 한 것 같았는데 그녀는 웃음을 띠며 농담으로 받아주었다. 이렇게 말을 쏟아내고 나니까 마음이 후련하다고 했다. 이런 개인적인 일까지 상세하게 말해주니 고맙기도 했지만 내가 해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갈 때에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살짝 안아주었는데 그녀는 한동안 팔을 풀지 않았다. LA에도 연말이 다가왔다. 한국처럼 춥고 눈도 오지 않지만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오면 조금씩 마음이 들뜨기도 한다. 동문회도 연말파티 행사준비로 모임을 가졌다. 연말이라 바빠서 그런지 모임이 끝난 후 회식도 없이 모두 가버렸다. 민정이는 할 말이 있다며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선배, 나는 파티에 참석 못해. 남편하고 여행 스케줄이 있어.” 섭섭한 말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문회보다 가족여행이 우선이다. 나는 달리 갈 곳도 없어 매년 참석하고 있었다. “괜찮아 참석 안 해도. 우리 둘이라도 밥 먹을래?” 조그만 식당으로 들어가 마주 앉았다. “남편하고는 어떻게 만났어?” 그녀는 밥을 먹으면서 또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학교 다닐 때 남자 친구들은 많았지만 나이도 같았고 하는 짓들이 어려보였어. 그들과 결혼은 염두에 두지 않았고 소꿉장난처럼 어렵게 살며 살림을 이루어 나가는 것도 싫었어. 나이 차이가 나더라도 기반이 잡힌 남자를 원했어. 아빠처럼 사업을 하는.” 그래서 아버지가 거래회사의 젊고 유능한 사장을 소개해주셨고 그 사람이 지금의 남편이라고 했다. 착하고 성실했으며 아버지만큼 잘생기지 않아서 여자문제는 없겠다 싶어 결정을 내렸다고 했다. 회사가 잘되어 미국에 지사를 설립했고 지금은 오히려 본사가 되어 3년 전에 미국에 같이 왔다고 했다. “뭐 하는 회사인데?” “나는 전혀 몰라. 돈 찍어내는 회사는 아닌데 돈은 많아. 선배 돈 필요해? 내가 좀 줄까?” “굶어 죽어도 후배 돈은 안 받아.” 우리는 뼈대 있는 선비집안이므로 절대로 욕심을 부리거나 돈을 탐내서는 안 된다. 학교 선생님으로 은퇴하신 아버지가 항상 하시던 말씀이다. 그래서 대대로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지만. 민정은 내 말에 움칠하며 “선배, 연말인데 우리 노래방 가자.” 연말파티에 못 온다는데 둘이서 조촐한 망년회를 갖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노래방도 연말 분위기답게 크리스마스트리와 반짝이는 작은 불빛들로 장식이 되어있었다. 나는 미국 온 지 오래되어 요즈음의 한국 노래는 모른다. 내가 아는 옛날 노래는 민정이가 모를 것이다. 무슨 노래를 불러야 할지 망설여졌다. “우리 춤추자 선배.” 뜻밖에도 민정이는 블루스 곡을 틀었다. 그리고 나를 끌어안고 스텝을 맞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눈동냥으로 추는 것인데 그녀는 아주 잘 추고 있었다. “언제 배웠어 잘 추네.” “아빠가 가르쳐 주었지.” 그런데 춤보다 느껴지는 무엇이 있었다. 안겨진 그녀의 몸이 남자의 본능을 일깨워 주고 있었다. 그런 느낌을 받는 것이 정상일지는 모르지만 민정이한테는 그럴 수가 없었다. 나를 아빠처럼 믿고 따르는데 여차하면 입이라도 맞출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냉정을 찾으려 해도 젊은 여자의 향기가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될 수 있는 한 몸의 간격을 띄우면서 추었다. 이윽고 음악이 끝났고 나는 시원한 맥주 한잔을 들이켰다. 민정이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또 다른 블루스 곡을 찾고 있었다. “민정아, 힘들어 좀 쉬자.” “그래, 안마해줄까?” 나의 다리를 주무르기 시작했다. 민정이가 정말 나를 남자로 안보고 아빠로 착각하는 것일까? 다시 몸이 짜릿해짐이 느껴졌다. 딸의 성의를 무시하고 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한 남자의 인내심을 시험하고 있는 것 같았다. “민정아. 그만 됐어, 우리 노래 부르자.” 나는 80년대 유행했던 ‘광화문 연가’를 눌렀다. “어머, 우리 아빠 18번이야 선배, 나도 알아. 같이 불러.” 민정이는 흥겹게 탬버린 장단을 맞추면서 같이 불러 주었고 나는 남자가 아닌 아빠의 위치를 지키면서 조촐한 망년회를 보냈다. 새해를 맞았다. 세월은 쉬지도 않고 어김없이 찾아온다. 또 한 살 먹어가고 있다. 가는 세월 아까워하면서도 오늘 하루를 즐겁고 보람 있게 보낼 거리가 없다. 디자인일 이외에는 다른 재주도 없고 경제적인 여유도 없어 멀리 여행갈 생각도 못한다. 그저 안 아프고 사고 없이 지내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할 뿐이다. 연휴가 끝나고 또 다람쥐 쳇바퀴 도는 일상적인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느덧 삼월이 되었다. 나무 가지에는 겨우내 매달려 있던 갈색의 늙은 잎 사이로 파란 새잎들이 머리를 내밀었고 눈길도 안 주었던 길거리의 작은 풀에서도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사람들도 봄이 오면 새 피부가 나오고 검은 머리카락이 다시 생겼으면 좋으련만. 마음에는 나이가 들지 않는 것 같은데 외모에는 변화가 확연하게 나타났다. 그동안 동문회 모임도 없었기에 민정이 만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낮, 민정이한테 전화가 걸려 와서 그녀의 집으로 갔었고 생각지도 않았던 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녀가 먼저 원해서 일어난 일이었고 내 잘못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혼자 허전하고 무서워 단순히 아빠 옆에서 자고 싶었는데 오히려 내가 감정에 못 이겨서 일어난 일은 아니었을까? 공연히 굴과 복분자까지 원망스러웠다. 아침에 그녀의 얼굴을 똑 바로 볼 수가 없어 간다는 말도 못하고 그녀의 집을 빠져나왔다. 이 일은 우리 둘만이 아는 사실이고 무덤까지 갖고 가야할 비밀이다. 그러나 그 황홀했던 기억은 영원히 잊지는 못할 것이다. 그날 이후로 그녀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내가 먼저 전화하기가 쑥스럽고 민망했다. 도덕적으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은 분명하지만 남편이 출장 갔다는 연락이 다시 한 번 오기를 은근히 기대하고도 있었다. 전시회 관계로 동문회 모임이 있었다. 나는 민정이 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고, 몸이 아파 못 나온다고 둘러대었다. 공연히 걱정도 되었고 궁금했지만 이런 일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리라 믿었다. 동문 전시회가 열리는 날, 민정이 동네에 사는 여자 후배에게 넌지시 그녀의 소식을 물어보았다. “선배님, 몰랐어요? 민정이 아기를 가졌어요.” “정말이야.” 이 기쁜 소식을 나한테 알리지 못한 것은 아직도 나와의 일로 마음이 편치 못했던 모양이다. “아마 앞으로 동문회는 못 나올걸요. 아기 낳고 기르려면.” 축하의 전화를 해주고 싶었다. 우리의 비밀스런 일도 서너 달이 지났으니 마음도 가라앉았을 터이다. 나이 든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걸었다. “민정아, 축하해. 아기를 가졌다면서.” “응 선배, 미안해 연락을 못 해서.” 반가운 목소리로 맞아주었다. 다행이었다. “몸조심하고 예쁘고 건강한 아기 낳기를 바래.” “고마워 선배. 한번 만나고 싶은데 배 나온 모습 보이기 싫어.” 아기를 가지면 얼굴도 붓고 몸매도 망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기 낳으면 꼭 연락해." 이제야 한시름 놓았다. 공연한 걱정을 했었고 기쁜 소식도 들어서 한결 그녀에 대한 마음이 가벼워졌다. 한편으로는 그날 일이 생각나서 아쉬운 마음도 들었지만 정상적인 아기가 태어나길 진심으로 기도했다. 또 한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다. 그동안 새로운 동문도 들어왔었고 병환으로 돌아가신 동문도 있었다. 오늘 동문회 연말 파티 날이다. 많은 동문이 부부 동반해서 왔었고 나는 총무라서 행사준비에 바빴다. 뷔페 음식을 들면서 파티는 시작되었고 블루스 춤곡이 나오자 부부들이 우르르 나와 춤을 추었다. 나는 아내가 같이 나오는 것을 싫어해서 늘 혼자 참석하고 있다. “선배님, 저랑 같이 춰요.” 민정이와 같은 동네에 사는 후배가 나의 팔을 잡았다. 이 후배도 혼자 왔기에 스스럼없이 따라나갔다. 작년에 민정이와 노래방에서 춤을 추던 기억이 떠올랐다. 손을 잡고 몸을 맞대며 춤을 추는데도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았다. 자석이 서로 당기는 쪽이 있고 밀어 내는 쪽이 있듯이 남녀관계도 그런 것 같았다. 아무튼, 즐거운 마음으로 춤을 추고 내려왔다. “참, 선배님, 민정이가 어제 아기를 낳았대요.” “정말이야, 보이야 걸이야?” “보이래요.” “순산했데?” “산모, 아기 모두 건강하대요.” 이런 경사스런 일이, 마치 내 딸이 아기를 낳은 듯 기뻤다. 그녀의 예쁜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나도 내 위치를 종잡을 수가 없다. 그녀의 아버지도 되었다가 연인이 되었다 하니 말이다. 나는 혼자 축하의 잔을 들었다. 일 년이 어느새 지나가버리고 오늘은 민정이 아이 첫 돌이다. 호텔 연회실에서 돌잔치가 열린다. 작년 그날 이후로 민정이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동안 아기 낳아 잘 키우고 있다는 전화는 한번 받았지만 그날의 일에 대해서는 서로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연인을 만나는 것처럼 마음이 설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거울 보는 것이 싫어진다. 그동안 흰 머리카락이 더 생겼고 주름살도 더 많아진 것 같았다. 마치 아버지의 얼굴을 대하는 것 같이 민망스럽다. 나는 형제 중에서 아버지와 제일 닮았고 더군다나 오른쪽 눈 밑에 똑같은 눈물점을 가지고 있다. 그 점 자체는 유전인자가 아니지만 아버지의 체질을 물러 받아서 그렇다고 했다. 가족 중에 누나도 점이 있었는데 결혼할 때 빼버렸다. 눈물점은 관상학적으로 재물이나 이성관계로 눈물 흘릴 일이 많아 좋지 않다고 했다. 아버지는 지금까지 별 사고 없이 장수하고 계시지만 물려 줄 재산이 한 푼도 없는 것을 보면 일리가 있는 것도 같다. 지금이라도 점을 빼면 돈이 들어올까라는 헛된 생각을 해보며 웃고 말았다. 다행히 내 아들은 아내의 체질을 더 닮았는지 눈 밑에 점이 없다. 미용실에 들러 안 하던 염색을 하고 머리도 단정히 손질했다. 내가 봐도 몇 년은 젊게 보였다. 시간이 되어 동문과 함께 호텔로 갔다. 홀 안쪽에 돌상이 차려져 있었고 남편같이 보이는 남자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그동안 남편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예쁘게 한복을 입은 민정이가 나를 보고 반가운 손짓을 보냈다. “반가워 민정아.” 너무 오랜만이라 남편이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포옹을 했다. “선배님, 우리 남편이에요.” 민정이는 말을 높이며 남편을 소개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아빠 같은 선배님이라 그랬는데 무척 젊게 보이시네요.” 남편 인상은 서글서글했고 웃음이 가득했다. 아이는 자기 생일날인지도 모른 채 아빠 품에서 자고 있었다. 나는 아이의 등을 쓰다듬어 주면서 “한번 안아보고 싶다. 민정아.” “조금 있다 깨면 안아주세요.” 사람들이 있어선지 민정이는 계속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왠지 조금 거리감이 느껴졌다. 우리는 동문회 표지판이 있는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잠시 후, 맛있는 음식들이 계속해서 나왔으며 양주도 원하는 대로 마실 수가 있었다. 민정이 부부가 아이의 돌잔치에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흐뭇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섭섭한 마음도 들었다. 그날의 황홀했던 기억이 잠시 머리를 스쳐갔다. 이제는 그날의 일은 완전히 지워버리고 민정이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기도해주는 것이 선배 된 도리일 것이다. 앞으로 만날 일도 드물 것이고 동문회도 더 이상 나오지 못할 것이다. 돌잡이 순서가 시작되었다. 큰 쟁반에 여러 가지 물건들이 놓여 있었고 모두 아이의 손짓에 눈이 쏠렸다. 아이는 서슴지 않고 크레온을 잡았다. 우리 테이블에서 제일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엄마가 미대 나왔으니 그럴 수도 있는 일이지만 나는 돈을 잡아 주기를 바랐다. “사내는 돈을 잡아야 나중에 잘살지, 크레온 잡으면 별 볼일 없어요. 여기 증인들이 있잖아요. 안 그래요?” 술김에 엉뚱한 말을 하고 말았다. 선배님들의 표정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냥 재미있다고 치는 박수지, 그게 무슨 뜻이 있다고 그래, 벌써 취했니? 총무." 그중 제일 못사는 선배가 나를 째려보면서 한마디를 던졌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선배님, 제가 그 증인이라 서요. 하하” 내 말에 서로 본인들은 아니라는 듯이 웃으며 넘어갔다. 돌잔치가 끝나가고 있었다. 민정이는 아이를 안고 남편과 함께 손님들을 배웅하고 있었고 그 어느 때보다도 즐겁고 환한 표정이었다. 동문도 일어나면서 갈 차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한번 안아 보고 싶어서 민정이 부부가 있는 쪽으로 갔다. 민정이는 나를 보더니 아이를 안겨주었고 아이는 낯도 안 가리고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엄마를 닮아서 무척 예쁘게 생겼고 마치 친손자를 안은 것 같은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예뻐, 작품이야. 민정아.” 고사리 같은 손을 꼭 잡고 아이의 볼에다 입을 맞추었다. 눈 밑에 무엇이 묻은 것 같아 손으로 닦아 주었는데 점이었다. 순간 내 몸은 얼어붙었고 하마터면 아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그것은 분명히 눈물점이었다. ▶수상소감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오면서 목이 말랐습니다. 태어나 처음 어머니한테 말을 배우며 세상을 알게 해준 모국어로 입상된 기쁨이 단비가 되어 적셔주었습니다. 저는 미술을 전공했고 지금도 광고디자인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과 글은 표현방법이 다를 뿐, 가슴으로 느끼는 것은 같았습니다. 소설 속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어 글 쓰는 동안 행복했습니다. 첫 소설이고 미흡한 점이 많은데도 뽑아주신 심사위원과 중앙일보에 감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참신한 작품 많았지만 '반소설-반수기적' 한계 못벗어 2014년 신인문학상은 기존의 작품 수준을 뛰어 넘은 새로운 작풍, 새로운 비전과 패기, 독특한 목소리, 신선한 열기로 만남의 문을 연다. 올해 응모작 중에는 축적된 작가적 에너지가 가속으로 배양된 의욕적이고 참신한 작품들이 많아 선자의 마음을 후끈 달게 했지만 아직도 반소설-반수기적 한계에 머문 작품들이 허다하다. 제대로 소설 같은 이야기들을 끌어 오거나 만들어내지 못했다. ‘나’라는 1인칭 하나가 온통 무대를 헤집고 소설의 고삐를 잡고 가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50 여편의 응모작 중에서 다음 작품들을 일차적으로 가려내 선상에 올린다. 최연홍의 ‘빙하’, 박이향의 ‘사막의 연가’, 정병규의 ‘눈물점’, 민유자의 ‘거벽’, 이기주의 ‘샌 포인트의 겨울 나그네’, 최지만의 ‘산으로 간 기러기’, 임지나의 ‘텀불위드’, 정혜연의 ‘들어줄게요’를 가려냈다. 하지만 이들 작품 중에는 눈에 번쩍 뜨일 만한 당선작이 보이지 않아 가작 섭렵에 나선다 정혜연의 ‘들어줄게요’ 는 일상의 타성과 권태, 타공간 속에 벽을 쌓고 가는 인간적 이슈를 이동적 피소설체로 써내려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를 연상케 한다. 300여매의 중편소설로 취지에 맞지않았고 박이향의 ‘사막의 연가’ 역시 단편이 아닌 300매 분량의 묵직한 중편으로 상황 설명에만 그친 감이 있어 도중 하차시켰다. 최연홍의 ‘빙하’는 한편의 서사시적 세련미와 유장한 문체가 돋보이나 굴곡과 반전이 없이 무수한 이야기의 전개로 단편이 갖는 소설적 집약과 사건의 플롯이 미흡했다. 임지나의 ‘텀불 위트’는 낙선시키기에 아까운 작품이었다. 구타했다는 아들의 고발로 구치소에 들어간 아버지와 페인트공으로 전락하는 뼈저린 삶의 리얼한 참경등이소설보다는 논픽션에 어울릴 듯 한 작품이다. 암벽을 타는 두 알피니스트의 기구한 이야기를 담은 민유자의 '거벽'은 암벽에서 추락한 악몽과 병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요트, 춤, 스쿠어다이빙, 여인과의 로맨스 등으로 치달리다 종내는 다시 암벽에 도전하는 인간 승리의 거벽 같은 의지가 감동을 불러 일으키나 이 역시 논픽션에 가까운 작품이다. 정병규의 ‘눈물점’은 김동인의 ‘발가락이 닮았다’를 연상케 하는 따뜻하고 애련한 델리켓한 작품이다. 선배와의 하룻밤 정사로 임신하고 득남. 첫돌 잔치에 초대된 노선배. 유전자로 해서 아이의 생산을 기피하고 두려워하던 남편. 소설적 허구와 동인, 갈등, 위기 등 서스펜스의 부족 등이 걸리지만 그런 대로 설정이 무난하고 진행이 순조로운 점을 높이 사서 가작에 천거한다. 최지만의 ‘산으로 간 기러기’ 는 새마을 운동의 성공사례 같은 스토리로 기러기 가족으로 미국과 한국 사이를 오가며 사는 부부가 남편이 암이 걸렸다는 거짓 전화로 아내를 귀국케 한 후 부부가 화합해 자연으로 돌아가는 귀농, 귀촌, 귀소 본능의 부활, 신토불이의 무공해 농작물을 도시의 아파트 촌에 직매하는 농촌 지도자의 애환을 수더분한 필체로 재미있고 무리없이 꾸려간 수법이 돋보여 가작에 선정한다. 이기주의 ‘샌 포인트의 겨울 나그네’ 는 단편소설로의 골격이 잡힌 구조이나 ‘에덴의 동쪽’ 같은 10대 소년들의 이유없는 반항, 마약과 섹스. 전위미술에 빠진 소년들과 가정을 이색적으로 표출한 미국소설 같은 인상. 문제아인 한국소년의 부모간의 의사 소통, 갈등, 위기의 조성없이 밋밋한 걸과 서술에만 머물러 가작 문턱에서 내려놓고 이 작가의 후일을 주목한다. <심사위원 홍승주 (소설가·시인) >

2014-05-20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